[기획연재]인문학 위기론을 성찰하다 (2) 인문학 위기 제기한 학자들의 현주소
2002-11-09 12:48:56
2002년 11월 09일 (토) 00:00:00 강성민 기자 webmaster@kyosu.net
인문학 위기론은 거대담론이다. 거대담론이 추상적인 것이라면, 인문학 위기론은 태생적 추상성에 학자들이 제기한 각종 당위성 원론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형국이다.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할지 모를 이런 시점에서 위기론을 제기했던 학자들의 현주소를 질문해보는 것은 그 난국지색의 형세를 드러내는 측면에서 필요한 일일 것이다.

침체된 분위기 속 내부 역량 강화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철학)의 목소리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는 얼마 전 “비판과 대안을 위해 뱉어 놓은 말의 業障이 너무 큰 나머지 우리 스스로 자괴하고 자멸해간다”는 말을 남기고 위기론의 현장에서 떠난 바 있다.

김 교수는 인문학의 미래에 지극히 비관적인데, 앞으로 50년 후면 인문학의 생존가능성이 없어지지 않겠는가 하는 입장이다. “환경 전체가 인문학의 적으로 바뀌는 세상입니다. 예전의 적은 인문학을 찾아와 방문을 노크하고 싸움을 걸었는데, 이젠 아예 무슨 말을 해도 듣는 척도 않더군요”라고 말한다. 비판담론으로서의 인문학 위기론은 항상 필요하지만, 우리 학계가 말을 하면 반응이 없고,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한마디 툭 던지는 식으로 “그런 말은 식상하다”고 공격하는 터라 힘이 빠진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앞으로 운동적인 차원의 노력보다는 “스스로 사상가로 크는 일”에 몰두할 생각이라고 한다.

김 교수와 ‘새로운 글쓰기 논쟁’을 벌인 바 있는 이진우 계명대 교수(철학)도 약간의 막막한 심정을 드러냈다. “너무 큰 줄기를 건드리다보니 이론적이지 못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곤 하면서 자성과 허탈감이 몰려왔다”는 소회가 그것. 그는 위기론 실종을 양비론으로 정리한다.

긍정적 측면은 학자들의 새로운 글쓰기, 대중적 글쓰기 필요성, 제기가 우리말로 학문하기 등을 통해 생산적으로 변형됐고, 동서양 담론의 충돌도 상호간 대화가 이뤄지면서 이원적 대립이 줄어드는 등 논의 과정에서 어느 정도 소득이 있었기 때문에 위기론이 잦아들었다고 본다. 특히 그는 “학자들이 미시적 탐구의 개미작업을 많이 하고 있는데, 이런 것은 여론에 포착되지 않는다”라며 ‘거시’에서 ‘미시’로 바뀐 판세도 고려해보라고 말한다. 반면에 교수평가제, 연봉계약제가 본격화 되면서 점수로 환원되지 않는 대사회발언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위기론 실종에 영향을 미쳤을 거고, 보다 큰 흐름에서 보자면 유전자 담론이나 테러 담론 등 온갖 위기의 요인들이 파죽지세로 몰려온 것 또한 논자들의 성찰을 위한 시간적 거리를 빼앗았다고 본다.

이에 비하면 표현인문학의 고안자 정대현 이화여대 교수(철학)는 인문학의 위기가 어느 정도 해소됐다는 낙관적인 입장을 보여줬다. “‘표현인문학’을 펴내고 10명 정도가 반론을 제기했을 때, 계간 ‘비평’에 이를 하나하나 반박하는 재반론을 폈다. 대응을 기다렸지만, 발언자가 없었다. 좀더 치열한 논의가 없어 아쉬웠지만 표현인문학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수긍한 것으로 해석했다”라고 말한다. 정 교수는 올 12월 열릴 예정인 유네스코 주최 국제인문학대회에서 ‘지식개념이 인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를 발표할 예정이다. 인문학이 생태, 정보, 영상 등을 자신의 언어로 수용하며 위기해결과 자기발전을 동시에 기하는 단계에 올라섰다고 덧붙였다.

인문학 위기의 철학적 논쟁자들은 지쳐 있었다. 그렇다면 제도인문학, 강단인문학의 위기를 부르짖었던 논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전국대학인문학연구소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유초하 충북대 교수(한국철학)는 인문학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탈출구를 발견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강단 인문학자들을 이끌고 정부의 인문학 지원을 꾸준히 요구해온 유 교수는 하지만 한국학술진흥재단이 매년 1천억여원의 자금을 3년간 인문학자들에게 지원키로 한 최근의 결정을 그리 탐탁치 않게 본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것이다. “개인연구비를 지원하는 형태가 아닌, 우수한 연구실적에 상금으로 주어지는 형식이라야만 장기적이고도 실제적인 지원이 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도 최근 정부의 학문정책이 변한 것 같지만,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라며, “지원금을 교수충원 등으로 돌려 전국 시간강사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한 학문의 위기는 계속된다”라고 비판한다. 평소 규율 권력으로서의 인문학 작동방식을 문제삼아온 그는, “7~8명의 교수가 돌아가며 논문을 심사하는 현구조에서는 학문의 동종교배적 생명유지가 불가피하다”라는 입장이다. 강 교수는 그동안 인문학 위기 담론은 이런 내부적 모순에 눈감고, 지원비에만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등 왜곡 과장된 면이 있으며, 요즘 추진되는 콘텐츠 학문으로서의 인문학 논의는 인문학의 도구화, 수단화로 가기 쉽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내보였다. 한마디로 위기의 본질은 암 덩어리 그대로인 채 남아있다는 진단.

위기론 필요하지만 새로운 논의틀 마련해야

인문학 위기론의 허구성을 꾸준히 말해온 김진석 인하대 교수(철학)는 “위기가 다각화됐다”라며 말을 꺼냈지만 곧 강경한 비판으로 돌아섰다. “일단 말할 수 있는 것은, 인문학 내부에서 연구 인력의 효과적 배치가 필요하다”는 것. 그는 학자들이 분과학문의 틀을 벗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학부제 실시가 오히려 분과학문의 고질병을 덮고 그 생명력을 연장시켜준 듯해 답답한 심정”이라고 말한다.

또한 인문학콘텐츠, 영상인문학 등 너무 한쪽으로만 몰리는 요즘 세태에도 불만을 표시했다. 내외부적으로 인문학의 상황이 나아진 것이 없다는 그는 “논쟁이 재생산되지 못하는 구조가 가장 큰 문제”라며, 여기엔 “자기와 연결된 문제에서는 절대 양보를 안하는 학자들의 정신상태가 크게 작용한다”라고 꼬집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는 인문학 위기론이 “급박한 현실의 필요성에 의해 제기됐기보다는 외부 문제에 인문학자들이 끌려가듯 진행됐기 때문”이라고 실종을 진단한다. 이것의 가장 큰 이유는 인문학이 내부에서 문제를 생산해내지 못하고, ‘식물적’으로 삶을 연명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윤교수는 거대담론적 문제제기도 필요하지만, 한국적 상황에서 문제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총론보다는 각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편 정부의 인문학 지원에 대해 박거용 상명대 교수(영어교육과)는 “정권 말기의 우연한 현상일 뿐이며, 정권이 바뀌면 도로 물거품이 될 게 뻔하다”라고 지적한다. 인문학 위기론이 뜸한 것은 사실 인문학자들의 안도감의 표현이기보다는 “비상식적인 재원확보와 지원방식 등에 대한 절망과 포기 쪽에 가깝다”라며 인문학에 대한 정부의 철학은 여전히 “돈 안 되는 눈엣가시”라고 말한다.
인문학 위기는 여전히 심각하다.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그렇다. 대부분 학자들이 인문학은 원래 위기였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인문학은 항상 위기에 대응하면서 힘겹게 살아왔다는 말. 이진우 교수의 “위기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론적인 문제틀로 제시하는 노력 없이는 다시 진정성 있는 위기론이 논의되기 힘들다”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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