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는 ‘새로운 예술의 해’였다. 날로 다양해지는 현대사회 속에 예술 역시 각자의 경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2001년 한국미술이 수용해야 하는 타 장르와의 ‘탈경계’와 동시대적 담론은 과연 무엇인가? 아울러 인문학 등 타 학문과 미술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만 하는가?
지난 한 해는 ‘새로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미술·연극·문학·음악·무용 작품이 전시되거나 공연되었다. 새로운 예술은 우선 자신만의 이야기 틀에서 빠져나와 다른 장르와 적극적으로 교감하면서 자신이 몸담고 있던 패러다임 혹은 장르를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장르를 재구성하는 것(re-genre-ation)’은 곧 새롭게 다시 사는 것, 즉 ‘갱생(regeneration)’이다. 이렇게 새롭게 구성되는 장르의 이야기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새로운 ‘우리’를 향해 함께 추는 춤이어야 한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미술계에서는 미술의 지평을 넓힘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도를 찾아볼 수 있었다. 그 희망적인 사례는 우순옥의 한옥 프로젝트 <어떤 은유들>이다. 삼청동의 한옥 한 채를 개조한 이 프로젝트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면서 또 여러 작품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고 있다. 공간 디자인과 연출에 성공한 이 한옥은 들어서는 즉시 우리 몸을 포근하게 감싸주기 때문에 한없이 눌러앉고 싶어진다. 안방에는 북악산과 경복궁도 보이고 동네 목욕탕 굴뚝도 보이는 넓은 창문이 있는데 그것은 그대로 하나의 사진 작품이다.
옆방에서는 물이 한 방울씩 뜨거운 철판 위로 떨어져 순간적으로 증발하는데 그때마다 온 집 안에 울리는 물방울 타는 소리는 훌륭한 배경 음악이 된다. 예술의 전당 디자인 미술관에서 열리는 <디자인 혹은 예술전>에 참여한 작가들도 미술의 탈장르화에 공감하는 노력을 보여준다. 특히 최정화는 오래 전부터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의 구별을 의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미술의 지평과 외연을 넓히는 데 성공했고 이수경의 <예술가 제복> 시리즈는 순수미술로부터의 성공적인 일탈을 보여준다.
미술의 지평을 바깥으로 확장시키려는 미술계 내부의 노력과 아울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접 장르에서 벌어지는 미술지향적 노력들이다. 이 중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안무가 겸 단독 퍼포머인 김효진이 수년 전부터 제시한 바 있는 ‘이미지 시어터’다. 그는 자신의 춤 작업을 설치미술·비디오 아트·음악·소리·영상 등의 요소와 몸이 자유로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라면서, 몸을 하나의 완벽한 오브제로, 또 그것의 움직임을 점·선·면·직선·곡선·원 등의 이미지를 무대 공간에 ‘그려내는 것’으로 개념화한다. 김효진의 이러한 미술 지향적 태도는 덕수궁 중화전 앞에서 이루어진 퍼포먼스 <회전하는 원을 그리다>와 새로운 예술의 해 무용 부문 완전 공모 부문의 당선작인 <원무(原舞)>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손과 발을 동작이나 손끝의 독특한 기교라는 좁은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 몸통을 미술적 이미지와 연결함으로써 무용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원무>는 김태근의 음악, 이종호의 무대 설치, 김형수의 영상 작업 등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완성된 설치미술 작품을 이뤄낸다. 이러한 훌륭한 디지털 사운드 작업은 디지털 영상매체환경에 있어서 사운드 역시 디자인되어야 할 하나의 오브제라는 명제를 작가들 사이에 확산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의 상호작용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살린 작품들은 역시 온라인 컴퓨터 아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김수정의 <그리즈(grids)>는 디렉터를 이용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새로운 문법 형성의 힘을 보여준 뛰어난 작품이다. 이 밖에도 블라인드 러브 프로젝트(www. blindlove.org)에 참여한 몇몇 작가 역시 상호작용의 디지털 매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새로운 방식을 스스로 터득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플래시를 이용해 웹으로 구현한 정성윤(www.ooo.pe.kr)의 <러브레터>나 김정한(www.banggoo.com)의 <러브워크>는 새로운 매체환경에 흥분하거나 함몰되지 않고 차분히 자신의 목소리에 담아내는 역량을 보여준다. 매체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새로운 매체의 의미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 텍스트 위주의 사고방식과 아날로그 매체를 전제로 한 아이디어 표현방식의 근본적 한계를 벗어나려는 이러한 젊은 작가들의 실험정신과 새로운 서사 전개방식에 디지털 미디어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
 |
| 무용 공연의 배경으로 쓰인 설치미술가 김태곤 씨의 작품. 예술 장르를 오가는 탈경계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
한국미술이 인접 장르와 인문학 등 외부와 공유해야 할 동시대적 화두는 ‘디지털 미디어’와 ‘몸’이다. 인간의 몸이 중요한 것은 모든 문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적·사회적 활동의 근원이 몸이며, 우리가 창조하는 모든 문화적 생산물과 문명 전반에 몸이 투영되어 있다. 니체가 강조하고 있듯이 정신이 오히려 우리 몸의 일부이며 몸은 항상 정신에 선행한다. 타인은 타인의 몸으로 내 앞에 나타나며 나는 내 몸으로 타인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 몸으로 이 세상에 관여하며 세상의 일부가 된다. 그렇기에 정화열은 몸이 곧 사회성의 기반이라 말한다. 몸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전제이며, 커뮤니케이션은 마음 사이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몸 사이의 문제다.
디지털 미디어 역시 결국 몸 친화적인 미디어로 발전할 것이다. 마셜 맥루한이 지적한 것처럼 미디어는 결국 인간 몸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이제 늦어도 10년 후면 데스크 톱 컴퓨터는 구시대의 유물이 될 것이고 모바일 컴퓨터가 보편적 형태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개의 작은 컴퓨터를 몸 여기 저기에 지니고 다니게 될 것이며 그것은 독자적인 IP 주소를 갖고 인터넷에 무선으로 연결될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의 빠른 발전은 모니터 중심의 시각 우월적 커뮤니케이션에서 청각과 촉각, 나아가 후각을 포함하는 다중감각적 매체를 보편화시킬 것이다. 다중감각적 디지털 미디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발전 방향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또는 원격현전(telepresence)이다. 가상현실은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지각의 장(field of perception)’으로서의 몸을 전제로 한다. 완벽하게 몸 친화적인 매체만이 완벽한 가상현실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마이크로비전사는 광선을 망막에 직접 쏘아서 이미지를 구현하는 ‘가상망막 디스플레이(VRD)’를 이미 개발했다. 가느다란 한 줄기 빛으로 망막의 시신경들을 빠르게 훑어가듯이 자극하여 영상을 볼 수 있게 하는 이 시스템은 스크린 화면과 현실 세상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해준다. 브리티시 텔레콤의 이안 피어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앞으로 10년 후면 망막에 미세한 레이저 광선을 직접 쏘아 이미지를 제공하는 ‘액티브 콘택트렌즈’가 등장하게 될 것이라 한다. 액티브 콘택트렌즈 착용자는 컴퓨터 화면과 현실 세상을 동시에 겹쳐서 볼 수도 있고, 현실 세상을 ‘끄고’ 컴퓨터 화면만 볼 수도 있으며, 아니면 한쪽 눈으로는 스크린을, 다른 눈으로는 바깥 세상을 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귀에 3차원의 사운드를 직접 제공하는 시스템도 등장하여 귀걸이처럼 착용하거나 귓속에 삽입하는 형태가 될 것이라 한다.
이리하여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될 것이다. 보는 것은 항상 보이는 대상에 대해 일정한 거리와 시선의 방향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망막에 생생한 영상을 직접 쏘아대는 액티브 콘택트렌즈를 착용하게 되면 시선이 어디를 향하든 상관없이 컴퓨터의 이미지는 유령처럼 항상 우리 앞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매체환경에서 미술은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인가? 이는 우리 모두 지금부터 고민해야 할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이제 21세기의 보편적 매체는 디지털 미디어가 될 것이 분명하며 인류의 역사 전반을 돌이켜볼 때 그 영향력은 문자의 발명을 능가할 것이라 한다. 인문학은 인간 삶의 방식에 대한 예술적·역사적·철학적 탐구이며 인문정신은 그러한 탐구를 기반으로 하여 삶의 지평을 넓히려는 자세다. 따라서 인문학은 반드시 인쇄매체의 하나인 책에 기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도 넓은 의미의 문학과 역사와 철학은 존재했다. 그러나 문자 발명 이전의 문화는 시각 위주의 문화가 아니라 청각·촉각도 모두 중요한 다중감각적 문화였다.
인문정신이나 인문학은 결코 문자학이나 문자매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21세기의 인문학은 문자매체와 인쇄매체를 뛰어넘어, 그것을 포괄하면서 디지털 미디어와 기존의 영상매체를 한데 포괄하는 창조적 인문정신을 계발해야 한다. 물론 인문학 없이는 미학이나 예술도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때의 인문학은 인쇄매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18∼19세기경에 인쇄매체에 기반을 둔 인문학이 꽃피었던 것처럼 이제는 디지털 매체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인문학, 새로운 인문정신이 그 빛을 발해야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