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문학 이야기를 듣다
[후기] 인문학 박물관 강좌
2009년 02월 18일 (수) 11:13:21 박태진 객원기자 taijin0227@naver.com

   
인문학 박물관 지하 소강당에 가득 찬 청중 / 사진 박태진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섰다. 가회민화박물관, 동림매듭박물관, 서울닭문화관 등 이정표가 안내하는 박물관만 6개. 동네 곳곳에는 각종 갤러리와 다실, 카페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과연 ‘인문학박물관’은 위치마저 범상치 않았다.

2월 14일, 인문학박물관이 개관 이래 첫 대중화 행사를 열고 ‘우리의 인문학’을 고민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한국의 근대와 우리 인문학의 형성’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첫째 마당은 진중권 중앙대학교 교수와 홍윤기 동국대학교 교수의 세미나가 장식했다.

오후 2시, 인문학박물관 지하 소강당을 약간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인산인해(人山人海). 30~40명이면 꽉 찰 것 같은 공간에 그 2배수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홍윤기 교수의 말처럼 ‘여러분들은 무엇을 얻으러 오셨’을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까지 서서 듣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열정이 뜨거웠다.

◆ 인문학 위기, 어쩌면 당연?… 미래 위해 인문학 ‘절실’

   
진중권(중앙대학교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 사진 박태진

세미나에서 홍윤기 교수와 진중권 교수는 한국 인문학의 현재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홍 교수는 ‘한국 인문학’의 정체성은 아직 미비한 상태고, 이는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철학과 단절, 국제적 소통 부재, 현실 대응 부족이 가져온 결과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인문학적 사유는 조선 중기를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사유의 전통은 일제시대를 기점으로 끊겼고 현재를 보는 사유와도 단절됐다. 전통, 현실과 소통하지 못한 상태서 해방과 전쟁을 겪은 후 ‘왜 벌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돈’을 벌었다.

홍 교수는 “빈약한 자기 확신을 갖고 돈을 벌다보니 전통의 등뼈가 부러지고, 압도적인 외국문물을 받았다”며 “앞으로 국가발전, 인간고유의 가치 찾을 수 있는 일들을 인문학이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 교수는 한국 인문학자들이 ‘변화된 매체환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인문학 기반 없이 발전된 기술은 한계에 부닥친다고 지적했다. 현재 기술과 예술, 인문학은 삼각컨소시엄을 이루는 추세다. 인문학자 자신도 매체와 기술의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

그는 최근 슈피겔, NHK 등 해외 언론사에서 ‘한국의 인터넷’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기술과 매체환경에서 한국보다 앞선 곳이 드물다는 증거. 진 교수는 “한국에서 인문학이 제대로 발달했다면 인터넷을 활용해 몇 개의 이론이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 교수는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을 ‘글쓰기 자체의 문제’라 설명했다. 전통적인 활자식․독백식 글쓰기는 소수의 것으로 한정되는 가운데, 대중을 위한 글쓰기는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

앞으로 글쓰기는 ‘스크립트’를 지향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 스크립트는 영상 진행을 위한 글이다. 이미 글을 쓸 때부터 머릿속에 개념이 아닌 영상으로 완성돼 문자가 일종의 상형문자화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또 짧고 대화적인 표현의 문장으로 ‘구술화’가 이뤄지고, 길게 쓴 것보다 그것을 한번에 보여주는 ‘카피라이트’가 주목받는다.

그는 “잘라내기-붙이기로 이뤄지는 하이퍼텍스트 글쓰기 때문에 네비게이션 능력과 몽타주 능력이 중요하다”며 “인터넷 글쓰기의 일반적 특성은 인문학자들의 글쓰기 형식에 고민을 던져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현실을 만드는 것은 여전히 글쓰기다. 문자-숫자코드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이미지를 다룰 줄 알게 된다”며 “결국 문자 세계를 아는 사람이 매트릭스의 주인이 될 것이고 인문학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 인문학, 삶 설계 위한 사유로 작용해야

   
홍윤기 교수(동국대학교 철학과)와 진중권 교수/ 사진 박태진

“인문학의 정체성을 찾는 문제가 의미가 있다면 ‘인간 삶의 설계’일 것입니다. 모든 개인이 죽을 때까지 살아남아야 함은 분명하고, 현재는 과거와 달리 생존 문제는 극복한 상태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세대는 너무나 많이 공급되는 인간 삶의 가능성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수도 있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을 하나의 인간으로 놓고 삶의 설계라는 측면에서 인문학의 각 부분을 모아야 합니다. 철학, 역사학, 문학 등 어떤 한 분과학문에 의존해서는 설득력 있는 담론 내놓기 어려우니니까요.”(홍윤기 동국대 교수)

인문학은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사유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찰’이다. 여러 사람이 사는 모습을 살펴 어떤 삶이 어떻게 좋았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홍 교수는 “인문학박물관은 인간 삶의 박물관으로서, 사태를 주도하는 사람에 대해 성찰하면 한국의 특색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어떨 때는 달리는 것보다 멈추는 것이 앞지르는 방법”이라고 전했다.

◆ 지금, 여기 그리고 나

두 명의 패널의 발제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질문과 견해가 쏟아졌다. 시대를 논하는 것부터 인문학자로서의 역할, 개인 삶의 고민 등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얻고 싶었던 것은 ‘인생’에 대한 해답이었다.

인간이 ‘잘 살아갈 수 있는 지식’으로서 인문학, ‘삶의 척도’를 생산하는 인문학을 기대한다. 공부를 통해 삶의 공허를 몰아내려 한다. 부디 ‘지금, 여기, 나’에 대한 눈을 키울 수 있기를.


* 더하기 1.
인문학박물관은 이번 ‘한국의 근대와 우리 인문학의 형성’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3월 21일까지 계속한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홈페이지(http://blog.naver.com/k_moh)를 참고하면 된다.

* 더하기 2.
"철학이 밥 먹여줍니까?"라고 누가 질문했는데

홍윤기 교수님이 "철학이 밥 먹여준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우리 학생들에게 미안한 부분이 많습니다. 철학이 밥 먹여주는 학문임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할테니까요. 저는 이제 '철학이 밥 먹여줍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오 마이 갓, 멋지다.

사실 진중권 교수님 때문에 들으러 간 강연이었는데, 홍윤기 교수의 입담에 반해서 돌아왔다. 물론 진 교수님의 강연이 훌륭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역시 인간은 보고 듣고 생각해야 함을 절실히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대전에서, 아니 전국 곳곳에서 이런 종류의 세미나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삶을 고민한다는 거,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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