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도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에서는 제1회 대안영상 학술강좌  <디지털영상예술읽기_2006 지금>을 개최하였습니다. 본 글은 기획된 강좌 중 심상용의 <디지털예술가의 초상>입니다.

디지털예술가의 초상
심상용 (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개념 미술로부터 디지털 미술에 이르기까지: ‘만드는 자’에서 ‘아는 자’로

 

20세기의 서구 미술은 레디메이드ready-made 미학이 야기한 논쟁에서 시작해 디지털 기반의 동영상작업이 예술의 근본에 제기한 일련의 급진적인 질문들과 더불어 막을 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논쟁적인 연대기의 서막과 대단원의 개략을 파악하기 위해, 즉각 두 명의 작가 곧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과 빌 비올라Bill Viola를 예로 떠올릴 수 있다. 뒤샹은 1913년 ‘기성품’ 논쟁을 야기한 장본인이고, 가장 영향력 있는 비디오 미술가 중의 한 명인 비올라의 작업은 특히 1988년 이후 거의 디지털 기술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두 작가와 두 시점 사이에는 많은 다양한 형식과 이념들이 발생했고, 또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여전히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두 시점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문맥, 또는 지향이랄 수 있는 것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전통적 예술의 틀, 즉 재료적 감각과 도구를 다루는 기술, 탁월한 손의 재능에 관련된 수공적 요인들을 부단히 거부해왔다는 점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이미 존재하는 대상의 단순한 장소 이동만으로도 탄생 가능한 예술작품을 선보였고, 비올라의 디지털적 편집에서 작가는 자신이 개발하거나 발전시키지 않은 상업용 소프트웨어의 도움으로, 몇몇 명령어의 실행만으로 생산이 가능한 그런 이미지의 생산자가 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지난 세기들 동안 화가와 조각가들은 이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생산했다. 적어도 17세기까지 (조각은 물론이고) 회화조차 다만 육체노동으로 인식되었고, 작가의 삶도 노동자들의 그것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은 화가가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1660년 벨라스케스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틀리에에서 많은 서책들이 나왔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일로 여겨질 정도였다. 이미 15세기의 이탈리아에는 다만 ‘존경받는 장인’을 넘어서는 창의력을 지닌 천재라는 생각이 있긴 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인해 당시 회화가 단순한 손재주가 아니라, 어느 정도 지적 차원의 수준으로 격상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다빈치 자신이야말로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였다. 전 생애의 약 40년 동안 그가 그린 다양한 영역의 스케치들은 2만여 점에 달했다(그중 절반인 1만여 점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뒤샹에 이르러 이 같은 노동의 전통에 대한 존엄성은 결정적으로 땅에 떨어졌다. 뒤샹은 예술가의 ‘육체’, 예술가의 ‘손’, 그리고 전적으로 그것들에 의존해 정의되어 왔던 전통적인 의미의 재능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 같은 기준에 의해 유명해진 마티스와 같은 화가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다. 예술가의 고유한 터치, 스타일 등 손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차원의 지식으로부터 말이다. 손으로부터의 해방에 관련된, 뒤샹이 출발시킨 이 역사는 한 세기가 거의 끝나가는 무렵 절정에 도달했다. 이 해방의 고조된 성취에서는 빌 비올라가 주요인물로 언급될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디지털 비디오 작업을 통해 뒤샹의 ‘옮기는’ 행위조차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예술은 이제 거추장스러운 3차원을 개입시키지 않으면서도 어떤 가상의 소통에 의해 가능한 것이 되었다. (주석1)


디지털 미학은 뒤샹의 관념주의를 극적으로 밀어붙였다. 그것은 손을 움직이는 것을 포함해 일체의 신체적 노동력을 수반하는 것, 더 나아가 3차원에 관련된 모든 번거로움을 완전히 청산해버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난 한 세기 내내 추진되어 온 역사의 성격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술이 물질계와 결연하게 단절을 꾀해온 것이고, 깨달음과 창조의 기관들이 점점 더 신체기관을 떠나온 것이다. 레디메이드 미학은 이미 자신 안에 예술가가 전적으로 지적인 정신노동자가 되고, 예술은 한 장의 컴팩트디스크 안에 충분히 압축되고도 남는 것이 되어버릴, 다가올 한 세기에 대한 예측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비물질적 요인들로만 구축된 새로운 영적 미학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 말이다.


작품의 비물질화는 이미 지난 세기 초부터 작가들의 비전이었다. 구성주의자 모흘리-나기L. Moholy-Nagy에게 ‘아름다움’이란 보는 순간 일어나야 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회화는 가능하면 자신의 존재에서 물질적 수위를 낮추어야 했다. 1960년대의 이브 클라인Yves Klein에게도 ‘만드는 것’은 이미 구식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실행자로서의 미술가’는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70년대에 들어 개념 미술의 물결은 작품의 비물질화를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개념 미술가들이야말로 엄격한 의미에서 철저한 영지주의자Gnostics들이었고, 반反유물론자들이었다.(주석2)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야말로 그들의 교리문답이었던 것이다. 어떻든 이들에게 물질적 토대는 작품의 본질이 아니었다. 작품은 그 고상한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오류투성이인 물질계가 아니라, 영계에 속한 것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작 예술의 본질은 개념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물적 토대는 다만 (정보를 운반하는) 매체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 개념 미술의 중추적인 믿음이었다.


예술의 물리적 토대에 대한 반성은 새로운 미학의 핵심이 되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가의 역사도 한발 더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념 미술 이전까지만 해도, 예술가들은 과거의 생산자로서의 장인에서 진화하긴 했지만, 여전히 ‘생각하는 생산자’, 혹은 ‘조금 큰 두뇌를 가진 장인’ 정도로 정의되었다. 예술가는 무언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생산은 결정적으로 손의 차원을 떠나고 때론 눈에도 보이지 않는 정도의 것이 되었다. 개념의 생산자, 곧 아이디어맨이 된 것이다. 생산장소의 성격도 이 변화를 따랐다. 구체적인 그림과 조각을 생산했던 길드는 조금 더 사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덜 사회적이어도 되는 개인 아틀리에를 거쳐, 결국 서류를 다루고 개인 컴퓨터를 올려놓을 정도의 책상 하나면 충분한 연구실 같은 것이 되었다.
분명한 것은 예술가들이 점점 ‘만드는 자’에서 ‘아는 자’로 되어왔다는 점이고, 미술사의 현장이 모델이 있고 안료 가루가 날리는 아틀리에에서 토론을 즐기는 살롱으로 이전해 왔다는 사실이다. 가스통 페르난데스 카레라Gaston Fernandez Carrera가 개념 미술을 언급하면서 그렇게 정의했던 것처럼, 20세기 미술사는 ‘사라짐disparaitre’의 메커니즘, 곧 비존재의 지속적인 웅변에 다름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의 환경 안에서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점점 덜 존재적으로 되어간다는 사실이다.(주석3)

 

 

 

이와 같은 비물질화를 지향하는 오랜 행보 속에서, 루시 리파드Lucy Lippard가 지적하는 예술작품의 ‘정보화’가 그토록 자연스럽게 이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주석4) 어떻든 20세기 미술의 개념주의적 성향은 여기서 보다 진화된 다음 단계로 이어졌는데, 그것은 컴퓨터 예술가 톰 드 위트가 적절하게 명명한 바 ‘데이터주의dataism’였다. 고도의 영지주의적 예술의 새로운 알리바이가 된 이 데이터이즘에 이르러 작품들은 비로소 오브제로부터 완전히 탈피해 수학적 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었다. 이제 새로운 예술은 단지 정보들의 집합체, 즉 순수한 데이터베이스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톰 드 위트에 의하자면, 컴퓨터 아트에서 “작품들이란 결국 추상적인 알고리듬 내지 데이터베이스”에 불과한 것이다. (주석5)

 


위대한 화가들의 전통과 그 이후

 

디지털 기술의 지원에 의한 일련의 매체 미술들이 작가의 전통적인 위상에 초래한 변화는 가히 획기적인 것이었다. 디지털 기술이 기존의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사진 기술이 처음 소개됐을 당시만큼이나 극적이었다. 19세기의 적지 않은 화가들이 자신들의 그림도구를 팔아 사진기를 장만했던 것처럼, 현대의 작가들도 정들었던 아날로그적 도구들을 팽개치고, 디지털 카메라와 개인 컴퓨터 장비를 구입하는 대열에 앞다투어 끼어들었다. 그리고 사진의 출현이 그랬듯, 이번에도 작가들이 전자상가를 왕래하면서 자신들의 장비를 개비하는 문제는 단지 도구적 차원의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주체의 관념에 매우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작가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전의 저자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띠는 개념이 되었다.


오늘날의 작가들은 작품 제작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술들조차 사서 사용한다. 이미 완성된 기술을 그 기술의 매뉴얼과 같이 백화점에서 구입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다만 ‘조작자’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린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매뉴얼을 잘 숙지한 다음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다. 조작자로서의 예술가, 그렇다면 세상이 너무 그럴 듯하기 때문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일은 더 이상 필요 없으며 다만 세상을 적절히 조작하기만 하면 될 것이라는, 앤디 워홀의 꿈이 이루어진 것인가? (주석6)하긴, 예술만을 위한 새로운 독립적인 기술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공급받기만 하면 되는 그토록 탁월한 기술이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다만 기술을 조작할 수밖에 없을 뿐인 조작자들은 이제 그 멋진 세상에서, 즉 그토록 멋진 기술의 진보를 하루가 다르게 성취해나가는 세상에서 주역도 조역도, 심지어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전에 화가들은 노동자들이었지만, 단순한 조작자들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장인으로서 자신들의 분야에서 최고의 재능과 기술의 보유자들이었다.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루벤스는 그의 나이 40세에 이미 전 유럽에서 확고한 명성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것은 뛰어난 그림 실력 때문이었다. 그는 화가로서 가장 전성기를 맞은 50대에도 예컨대 티치아노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자신의 ‘그리기 기술’을 훈련하고 재정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스페인의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들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났고 또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므로 언제나 동료 궁정화가들의 질투의 대상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당대에 대리석을 가장 잘 다루는 조각가였고, 연장자이자 당대의 또 다른 천재였던 다빈치의 일거리를 가로챌 정도로 뛰어난 화가였으며, 로댕도 흙을 가장 잘 이해하고 다룰 줄 아는 전문가였다. 다비드나 쿠르베까지만 해도, 필요한 물감의 혼합농도와 붓이 캔버스에 닿는 감각 등에 있어서,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는 탁월한 기술과 솜씨의 소유자들이었다.(주석7)


위대한 화가들의 전통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화가들이 그 기원으로부터 특별히 남다른 존재로 여겨졌던 것은 기술의 탁월함과 숙련성 때문이었다. 고대의 화가 제욱시스의 뛰어난 재주로 그려진 포도송이가 참새들의 눈을 속였다는 기록은 잘 알려져 있다. 동시대의 화가 파라시오스는 참새의 눈을 속인 제욱시스의 눈을 다시 속일 정도로 정교하게 그릴 수 있는 화가였다고 한다. 이 같은 예는 지천으로 널려 있다. 아펠레스가 그린 암말은 수컷을 흥분하게 할 정도였고, 프로토게네스가 그린 뱀은 새들의 지저귐을 일시에 멈추게 했다 한다.(주석8)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소도마와 17세기의 안니발레 카라치는 전적으로 기억에만 의존해서 완벽한 초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카렐 반 만데Carel van Mander의 기록을 따르자면, 프랑스의 화가 마르탱 프레미네는 언제나 밑그림 없이 사람의 형상을 그렸는데, 그 솜씨가 어찌나 출중하던지 국왕이 감탄을 연발할 정도였다.(주석9) 루키아노스Hermot Lukianos는 자신의 기록을 통해 발톱만 보고도 그 사자의 체구가 어느 정도로 표현되어야 할지를 정확하게 계산해내는, 보통사람이 도저히 깨치기 어려운 비례 감각을 지닌 화가 피디아스를 소개한다.(주석10) 이밖에도 화가 틴토레토는 한 그림 시합에서 다른 사람들이 고작 밑그림을 고치고 있는 동안 작품을 완성했고, 렘브란트는 하인이 시장에 겨자를 배달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도 채 안 걸려 동판화 한 점을 새길 수 있었다 한다.

 


다소 과장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같은 고도의 기술 수준에 비하자면 오늘날 전자적 이미지를 취급하는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의 컴퓨터적 처리나 멀티미디어 운용 기술은 거의 초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많은 경우 작가들이 활용하는 기술은 아마추어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 더 나아가 첨단 디지털 기술과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요구하는 엄청난 비용의 문제를 고려할 때, 기술과 그것의 미적 활용 사이의 간격은 좁혀지기는커녕 더 벌어질 일만이 남아있다. 기술과 미학의 이 간극을 해결할 열쇠가 전적으로 기술 개발자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점도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한다.


피카소는 아틀리에 밖의 세상을 기웃거리다 신문이나 잡지 쪼가리를 들고 아틀리에로 돌아왔다(콜라주). 팝과 누보 레알리스트nouveau réaliste들, 그리고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작가들은 그보다는 훨씬 무게가 나가는 물건들을 가지고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든 그들은 물건들을 들여와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늘어놓거나 재구성했다. 그들 모두는 작업의 재료를 외부에서 들여옴으로써 사회와의 단절이라는 모더니즘의 도그마를 어떤 식으로든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디지털 기술과 그것에 기반을 둔 미디어를 사용하는 작가들도 자신들의 시대에서 뭔가를 취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이번에는 재료뿐 아니라 재료를 다루는 기술까지 끌어들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디지털 미술은 ‘거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현대미술의 수많은 결과물들이 예술의 순수성에 대해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을 비웃는 것처럼, 디지털 미술도 그 자체로 전통적인 예술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예컨대 디지털 기술로 제작된 비디오 작업이 자주 전통 조각과 비교되곤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레 르빈느Les Levine는 언제나 자신을 비디오 조각가로 부르고, 게리 힐Gary Hill은 실제로 조각가 출신이다. 그런가 하면, 빌 비올라Bill Viola의 비디오 작업은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조각만큼 탁월한 ‘시간의 조각’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미켈란젤로가 대리석 속에 이미 내재해 있는 형상을 끄집어내는 것이라면, 비올라의 비디오는 흐르는 시간에 내재하는 이미지를 끄집어내어 형상화했다는 것이다.(주석11)


그럼에도 이 상이한 두 조각에서 사용된 기술의 수준 차는 무심코 지나쳐선 안 될 문제다. 즉,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내부에서 형상을 끄집어내면서 전적으로 자신이 터득한 기술을 사용한 반면, 빌 비올라가 시간을 조각하기 위해 사용했던 기술들, 시간을 파내는 정과 망치질은 그 개발과 완성에 자신이 개입한 적이 없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기술이었다. 예를 들어 그의 영상작업의 특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느림효과’는 그가 일본에 머물던 시절인 1981년 소니사와 기술 제휴한 아츄기 연구소에서 배운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대리석을 다루고 도구들을 취급하며, 재료와 기술의 접점들에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개입시키는 데에서 당대 최고 재능의 소유자였지만, 비올라는 시간과 이미지를 다루는 수많은 기술들 중에서 일련의 초보적이고 보편화된 편집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은 비올라가 1983년 메모리얼 미디어 센터에서 사진과 영상이미지의 접합을 연구한 예처럼, 때론 자신만의 독특한 편집방식을 연구하는 경우에도 크게 변함없는 사실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을 들어보자.

 

 

저자의 경우는 그 유명한 특수효과 등과 같이 그들이 스스로 제작하지도 않은 기술적인 자원을 활용하는 엔지니어나 기술자가 되거나, 전문적인 형태를 갖춘 연구를 별로 반기지 않는 인기 대중잡지에 등장하는 유명인사나 스타로 전락해가는 중이다.(주석12)

 

현재대로라면, 예술가들은 앞으로도 그 진화과정에 결코 자신이 개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더 빠른 진화로 자신에게 더욱 위협적이 될 기술의 권력에 전적으로 노출될 것이다. 예술은 고도 기술사회의 기술적 전개에 의존적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고, 그렇게 산업과 자본의 빠져나올 수 없는 순환 안으로 더욱 얽혀 들어가게 될 것이다.(주석13) 예컨대 토마스 포레트Thomas Porett 같은 작가는 디지털화된 이미지 시퀀스의 제작을 위해 매직, 맥비전, 음향 테입을 위한 매킨토시, 매킨토시 플러스와 같은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구입하고 그 매뉴얼을 익혀야만 했는데, 이 중 하나의 소프트웨어만 없었더라도 작품을 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의 작가들은 마치 뿌리칠 수 없는 유혹에 넘어가는 청년처럼 기술에 매료되어가고 있다. 흥미로운 예로 컴퓨터 예술가인 미겔 슈발리에Miguel Chevalier를 들 수 있는데, 그는 기존의 이미지를 신속하고 예외적인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컴퓨터의 변형능력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아예 인간의 능력보다 컴퓨터의 기술적 가능성에 더 기대를 거는 듯한 라이너 가날Rainer Ganahl 같은 작가도 없지 않다.

 

나는 엄청나게 많은 가능성을 포기하면서 오로지 컴퓨터가 제공하는 개념적인 능력과 문서작성의 능력을 활용하려 애쓴다.(주석14)

 

컴퓨터 예술가인 윌리엄 라탐William Latham의 언급도 이의 연장일 텐데, 그는 “정상적인 정신이 수행할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연속적인 연산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어 컴퓨터 기술탐구로 나아갔고, 과학자들과 함께 뮤테토Mutator라는 예술진화 프로그램, 즉 자기진화형 인터페이스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이미 1979년 프랑스의 에르베 위트릭Hervé Huitric과 물리학 이론가인 모니크 나스Monique Nahas는 그들의 이미지 속에 구상적 요소들을 개입시키기 위해 B-스플린B-splin이라는 복잡한 곡선과 표면을 포트란으로 프로그래밍했다. 이들과 파리 8대학의 동료인 미셸 브레Michel Bret는 자신의 3차원 애니메이션 이미지 합성을 위해 애니플로Anyflo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주석15)


예술은 기술에 의존하거나 아예 기술 자체가 되었고, 마치 기술결정론 시대의 모범을 보이듯 예술가는 프로그램 설계자로 ‘전직’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작가’인 존 피어슨John Pearson 같은 이에게 실제적인 예술적 가치는 새로운 소프트웨어의 개발에 있다. (주석16)
적지 않은 수의 작가들이 기술로부터 영감을 받고, 기술에 매료되어가고 있으며, 감격하면서 기대를 걸기도 한다. 그들은 이미 기술자인 셈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렇다고 말하기 곤란한 모호한 경우들이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전자적인 미술로 전자시대와 맞서 싸우고자 하는 경우인데, 이 분야에서 비교적 초기라 할 수 있는 시대의 볼프 보스텔Wolf Vostell과 백남준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더니즘의 저항정신을 계승함으로써, 동시대의 기술에 일련의 보복을 가하고자 했다. 보스텔은 텔레비전 수상기를 부수거나 철사로 묶는 방식으로 전자문화에 일격을 가하고자 했다. 초기의 백남준은 강력한 전자석으로 전광판을 가로질러 그 자장의 패턴에 따라 영상이 변형되도록 함으로써, TV 프로그램의 소통을 방해했다.(주석17) 그러나 후에 그는 TV 브라, TV 첼로, TV 정원, 심지어는 TV 인간까지 만들었다. 부정을 위해 출발했던 제스처에 재미가 들렸다고 할까!
어떻든 백남준은 자신이 거부하고자 했던 텔레비전 덕에 자신을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텔레비전의 거부인가, 텔레비전인가? 과연 어느 쪽이 메시지의 궁극인가는 아직도 불분명하게 남아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텔레비전은 전위미술을 위해 봉사하는 대신 재빠르게 그것을 자신의 세계 안으로 흡수해버렸다.(주석18) 1969년의 <참여 텔레비전>에서 백남준은 휘어지거나 구부러진 주사선들은 “기술에 대한 자신의 철저한, 그리고 충분히 인문학적인 증오”의 반증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증오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단 텔레비전을 켜야만 했던 것이다.
디지털의 영역에선 아마 고전古典은 있을지라도, 진정한 거장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기술의 지원이 막중하고, 기술로부터 영감을 받는 이 영역에서 기술은 이전의 작가들이 상상도 못할 새로운 가능성을 매우 빠르게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생산자들은 이전의 전범에 덜 매일 수 있을 것이므로 더 고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동네야말로 이미 쇄신된 기술로 인해 누구든, 물론 다음 기술이 개발되기 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만, 최고의 개척자가 될 수 있는 진정한 ‘꼬마들’의 동네인 것이다. 여기서는 현재와 부단한 쇄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거니와 이 부단한 쇄신을 지탱해나갈 주체는 디지털 매체 엘리트들인 것이다.

 


디지털의 기술결정주의

 

미학의 영역에 유입된 디지털 기술은 예술 환경의 근본적인 변화는 물론, 예술의 생존방식과 그 운명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기술의 변화속도가 개인이나 기업, 정부와 마찬가지로 예술에도 경쟁의 미학을 보급한 것이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은 단지 선택만 하면 작품이 되는 레디메이드 개념으로 정작 ‘작품’을 추방해버린 뒤샹조차 작품을 너무 빨리 만들어 내다 파는 세태를 비난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뒤샹이 달라진 세상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디지털 시대와 디지털 미학의 시대를 맞아 예술가들은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그리고 이제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스타일이 아니라, 먼저 새로운 기술을 점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겨를조차 없게 되면, 스타일도 형식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 치열한 경쟁은 다만 소외를 더 부추길 뿐이다. 왜냐하면 그 기술의 원천이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술의 기술이 자체적으로 진화되어 나가는 대신, 어느 순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되면서, 모더니즘 미술의 토대는 완전히 공염불로 돌아갔다.


새삼스러운 지적이 아니다. 디지털 정보화는 인간이 역사의 전 기간 동안 축적해온 ‘유산’을 (지적 재산권이란 구실로) 자본주의 상품적 순환 안에 유폐시켜버리지 않았던가. 디지털 기술이 가속화시킨 자동화는 도처에서 대량의 실업자를 양산하고 있다(특히 단순직 노동자들의 실업사태가 심각하다).(주석19) 디지털 기술은 현대인의 일상의 세부들에까지 침투해, 이전엔 사적이고 독립적이었던 요인들을 자본의 재생산과정에 매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미학의 영역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디지털 기술을 수용하면서, 예술도 자신이 사용하는 기술을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체계 전반의 압력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위협적일수록 거리를 띄는 것이 중요한데, 바로 이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버린다. 결국 갈수록 외부 의존도가 상승하고, 자율성이 상실되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은 그 기술의 진정한 수혜자인 특권자들에 의해 ‘주어진다’는 점에서 결코 중립적이지도, 중립적일 수도 없으며, 결국 사회체제들을 획일화하고 마는 논리의 확산에 기여한다.(주석20) “과연 우리에게 허용된 유일한 비물질은 기술적 질서뿐인가?”라고 탄식한 레지스 드브레도 이와 같은 문맥이었다. (주석21)

 


맥루한H. M. Mcluhan의 기술결정론적인 문맥은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적절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주석22) 이 같은 관점은 우리에게 디지털 기술이 다만 예술의 기술적이거나 매체적인 차원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그 기술을 관리하고 매체를 취급하는 주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주석23) 자크 엘륄도 현대기술에 내재된 힘이 휴머니즘에 내재된 힘을 압도함으로, 생존을 확대하기 위한 기계들이 우리를 새로운 노예상태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중요한 것은 디지털 기술이 디지털 미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날로그 기술이 종래의 예술에서 차지하는 비중 이상으로 지대하다는 사실이다(최종적인 결과가 산출되는 데 결정적인 요인들을 기술이 제공한다).


이 같은 입장이 기술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감techno-phobia을 주장하는 ‘혐오론자’의 그것과 혼돈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하지만, 이 초산업적이고 초시간적이기도 한 디지털 기술의 미적 유용이 우리가 이제까지 특별한 정신의 유형으로 분류하려 시도해왔던 틀이 생존하는 데 얼마나 넘기 어려운 딜레마인가를 직시해야만 한다. 통신케이블을 타고 흐르는 미술, 디지털 기술로 완료된 비물질화의 꿈으로 가득 찬 장래에 관해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예술이라는 이 발명된 이념은 피할 수 없이 치명타를 얻어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낙관주의자처럼 사태를 관망하는 데 더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예술가가 자신의 재능이 미치지 못하는 것들, 자신의 고유한 재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로 자신의 표현행위의 점점 더 많은 부분들을 채워가는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겪는 과정이야말로 근대적 의미의 ‘독단적인 저자’를 민주적으로 무장해제시키고, 언제나 접속 가능한 형태의 저자를 지향해 나가는 바람직한 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결과는 ‘민주적 저자’가 아니라, ‘저자의 죽음’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는 아직 적극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어떤 의문점들이 있다. 이를테면, 외부세계의 이물질들을 잔뜩 주사해서 전통적인 저자의 기반을 해체해버리는 것이 독단적인 모더니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해결일까? 바로 거기서 ‘민주적 저자’, 또는 열린, 타자적인 저자란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 개념인가? 혹 ‘민주적 저자’가 아니라, ‘저자의 죽음’이 그 결과인지 누가 알겠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기 전에 다시 한번 명료하게 사실관계를 확인하자. 전자시대의 작가들은 점점 더 자신들의 작업을 실행할 기술과 매체들에 대해 무지해지고 있다. 그들은 점점 더 작은 부분에서만 자신의 ‘조절하는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다. 점점 더 소비하는 만큼, 덜 창작하게 된다. 표현행위와 그 기술에서 이전보다 훨씬 덜 특권층이 되는 것이다.

 


나가면서

 

미술의 역사는 장인으로서 자신들의 분야에서 최고의 재능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화가와 조각가들에 관해 전해준다. 티치아노와 루벤스, 벨라스케스와 베르메르.... 이들 모두는 자신이 다루는 재료와 도구, 기술에서 당대의 최고들로서, 어떤 경우에도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는 탁월한 기술과 솜씨를 지녔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능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을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시각 세계로 안내했다. 이 같은 고도의 솜씨에 비하자면, 오늘날 전자적 이미지를 취급하는 작가들이 컴퓨터나 멀티미디어 같은 도구를 다루는 기술은 아마추어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
더구나 작가들은 이제 엔지니어나 기술자가 되어가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특성상, 그것이 최종적인 결과의 산출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기술의 미학적 전용이라는 이전까지의 일반적인 논의와는 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는 작가들이 정작 자신들의 작품제작에 필요한 기술적 기반으로부터 급속하게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관념화되면서 기술적으로 소외되는 일은 이미 오래 전에, 즉 무언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작가를 거부하면서부터 예견된 결과였다. 예술의 생산이 손의 차원을 떠나고, 작가가 개념의 생산자가 되면서부터 말이다. 이 같은 역사의 동일한 선상에서, 가장 비물질적이고 정보적인 디지털 미술의 출현은 하등 놀라운 사건이 아닐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점점 위력적이 되어가고, 그럴수록 의심스러워져가는 이 전자적 소통에 의해 재규정되는 작가를 바라보게 된다. 급속하게 산업현장으로부터 밀려오는 일일이 따라잡을 수 없는 기술들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가전제품을 구입한 매뉴얼의 페이지를 넘기는 소비자화된 작가들의 서글픈 이미지들을 목격한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으로부터 하루가 다르게 미끄러져 나가는 것들을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면서, 예술의 불안한 미래의 문턱에 서있다. 그들 중 몇몇은 근심에 차서 자신의 재능으로 빛을 창조하고 그것으로 마음껏 형태와 색채를 조절하곤 했던 시대를 뒤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 독단적이었으며 신념에 찼던, 다시 복원하기 어려울 재능의 시대를.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신념들과 더불어 부단히 해체해가고 있는 저자들의 왜소한, 그러나 무언가를 짊어져야 할 것 같은 어깨를 바라보고 있다. 그 뒤로 푸르스름한 전자적 빛을 후광처럼 받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주석

1) (백남준도 있지만) 굳이 비올라를 예로 드는 것은 그에게서 사상과 기술 사이의 완전한 일치를 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비물질주의적인 생각과 디지털 기술이, 이를테면 도일 시절 자신의 예술관 구축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선불교와 소니Sony사의 영상기술 간의 완전한 협력상태 같은 것이 목격된다. 그뿐 아니다. 그는 히말라야에 있는 라다크Ladakh 지방을 여행하면서 티벳불교의 종교성과 예식에 심취하고, 한편으로는 롱비치에 있는 메모리얼 미디어 센터Memorial Media Center에서 사진과 동영상의 접합을 연구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힌두교의 제례의식을 연구하기 위해 피디시 섬을 방문하고, 인디언들의 무덤과 벽화들을 연구하기도 한다.
2) 창조주 하느님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식을 통하여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이 영지주의Gnosticism의 주장이었다.
3) Gaston Fernandez Carrera, La Fable vraie, Paris, la lettre volée, p.91
4) 프랑크 포빼르, 『전자시대의 예술』, 박숙영 옮김, 예경, 1999, p.87
5) 야마구치 가쓰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