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도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에서는 제1회 대안영상 학술강좌  <디지털영상예술읽기_2006 지금>을 개최하였습니다. 본 글은 기획된 강좌 중 진중권의 <디지털 가상-빌렘 플루서의 디지털 존재론>입니다.  함께 공유하고자 아이공 블로그에 올립니다.외부에 올리실때는 덧글을 부탁드립니다. 

 

디지털 가상-빌렘 플루서의 디지털 존재론

 

(진중권 문화평론가)

 

 


“왜 우리는 가상을 불신하는가?” 플루서의 논문 <디지털 가상>은 도발적 물음으로 시작된다. 플루서에 따르면 가상에 대한 불신은 우리 자신이 고안한 세계가 있고, 그 바깥에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따로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신이 주신 세계를 믿는 인간은 자신이 만든 세계를 불신한다. 대안적 세계는 주어진 것(Datum)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Fackum)이다. 그래서 우리는 후자를 불신한다.
가상에 대한 불신은 철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가령 플라톤에게 참된 것은 오직 이데아의 세계요,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실은 가상에 불과했다. 그는 물론 이 가상을 믿지 않았다. 이 가상을 재현한 조각이나 회화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플루서는 가상을 폄하하는 이 플라톤주의를 의문에 부친다. “그렇다면 왜 가상은 왜 기만을 하는가? 또 이 세상에는 속이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사실 플라톤 자신도 현실을 가상으로 보았다. 더 참 된 세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을 가상으로 보기 위해 굳이 이데아를 설정할 필요는 없다. 가령 이데아를 믿지 않는 유물론자 데모크리투스에게도 현실은 가상이었다. 우리의 감각에 비치는 모든 사물은 허깨비이고, 그것들의 본질은 원자의 배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루서를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묻게 된다. “이 세상에 속이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인간의 실존

‘실존’(Existenz)라는 말이 있다. 철학에서 이 말은 ‘존재’(Sein)와는 구별되는 의미를 갖는다. ‘실존’이란 어떤 것이 그 본질에 합당하게 제대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이 낱말을 분석해 보면 ek(밖에) + sistens (존재한다)의 결합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실존’, 즉 인간이 인간의 본질에 적합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그 무언가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무엇의 바깥인가? 물론 자연의 바깥이다.
성경에서는 이를 신의 ‘형벌’로 묘사한다. 신이 주신 낙원에 살던 인간들이 죄의 대가로 그곳에서 추방되어 ‘노동의 수고’를 하게 됐다는 <창세기>의 설화는, 인간이 자연의 품에서 나와 자연을 개조한 인공적 세계(Faktum)로 이행하는 과정을 신학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바깥(ek)으로 나올(sistens)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되고, 이때‘역사’라는 것도 시작된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이를 타락사로 간주한다.
청동기 시대 이래로 인간은 주어진 세계(Datum)를 만들어진 세계(Faktum)로 바꾸어 왔다. 오늘날 주위를 둘러보면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세계는 거의 없다. 자기 밖의 자연을 모두 인공의 환경으로 바꿔놓은 인간은 이제 제 자신의 몸까지도 인위적으로 가공할 태세다. 플라톤적 신학은 이를 타락의 상태라 존재론적으로 비난하나, 플루서의 니체주의는 대안적 세계를 만드는 인간의 활동을 미학적으로 긍정한다.

 


◉모상에서 모형으로


인간은 없는 세계를 창조하면서 살아왔으면서도 오랫동안 자신이 그저 신의 설계를 모방하고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중세의 성직자들은 저 하늘 어딘가에 이상적인 신발의 규준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정신의 눈으로 신발의 이데아를 관조하여 장인들에게 이상적인 신발의 규준을 제시했고, 장인들은 그 규준에 따라 신발을 제작했다. 신발의 가격 역시 제품이 성직자들이 제시한 규준과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따라 결정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작’은  이미 존재하는 이상(이데아)을 모방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르네상스에 이르면 제작의 관념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르네상스의 수공업자들은 주문 생산을 하지 않고 자유로운 시장을 위해 생산을 했다. 시장에서 신발의 가격은 원상과 모상의 일치가 아니라, 수요와 공급에 따라 사후적으로 결정된다. 교회의 주문자는 구두의 형태를 사전에 결정하지만, 시장의 소비자는 구두의 형태를 사후에 선택할 뿐이다.
여기서 형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장인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장인들은 “이상적인 신발”, 신발의 영원불변한 형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신발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들이며, 그 형태를 개선하는 것도 자신들이라 믿었다. 이제 제작은 현대적 의미의 ‘디자인’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디자인은 ‘이미 있는 것의 모상’을 뜨는 것이 아니라 ‘아직 없는 것의 모형’을 만드는 작업이다.

 

 

 

◉관조에서 이론으로


이론을 의미하는 낱말 ‘theoria'는 원래 ‘관조’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정신의 눈으로 영원불변한 이데아를 조용히 바라보는 것을 가리켰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형태’란 더 이상 영원불변한 이데아가 아니라 변화시킬 수 있는 모형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에 따라 ‘theoria’역시 영원불변한 이상을 관조하는 게 아니라 관찰과 실험에 따라 모형을 만드는 작업을 의미하게 된다. 이론가는 이제 성당과 수도원에서 공작소(대학, 기술대학, 산업실험실)로 자리를 옮긴다. 이론은 더 이상 이미 있는 것의 관조가 아니라 아직 없는 것의 모형을 만드는 활동이다. 이 과정에서 제작의 모형은 문자나 그림보다 숫자로 더 잘 표현된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이때부터 이론가는 글자나 형상이 아니라 점점 더 숫자로 생각하게 된다. 이제 세계는 숫자로 씌어진 거대한 책으로 이해된다.
플루서가 말하는 것은 17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변화, 즉 자연의 수학화를 가리킬 것이다. 이 변화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더 이상 자연의 본질을 묻지 않는다. 자연의 현상을 문자로 기술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자연이란 그저 수많은 방정식들의 총합일 뿐이다. 이렇게 자연의 현상을 수로 기술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테크놀로지를 통해 자연을 정복할 가능성은 극대화한다.

 

 

 

◉역사적 사유에서 형식적 사유로


최초의 이론가들은 주술이라는 형상적 사유와 싸웠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선형적, 과정적, 논리적, 역사적 의식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사람들이 점점 더 문자가 아니라 숫자로 사유하게 됨에 따라, 역사적 의식의 자리에 형식적 의식이 등장하게 된다. 인간의 사유는 이렇게 선형적, 역사적, 계몽적 의식에서 빠르게 형식적, 계산적, 분석적 의식으로 변해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문자로 세계의 모상을 뜨는 게 아니라,  숫자로 아직 없는 것의 모형을 구성하는 것이다. 아마도 1950년대에 프랑스에서 구조주의가 역사주의를 몰아낸 것은 바로 이런 변화의 이론적 반영일 것이다. 최근 프랑스 철학자들이 운위하는 ‘역사의 종말’은 이 구조주의적 전회의 산물이다. 물론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보적-계몽적으로 사유한다. 그들은 세계를 인과관계의 사슬로 파악하고, 거기에 개입하여 그 고리를 파괴함으로써 인간을 필연성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한다. 이들의 의식은 여전히 선형적, 문학적, 문자적이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세계를 인과의 연쇄가 아니라 주사위 던지기로 파악한다. 진보적-계몽적으로가 아니라 미래학적, 체계적 혹은 구조적으로 사유하는 이들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의 모상이 아니라 앞으로 존재하게 될 세계의 모델을 만들어낸다. 앞으로 숫자로 사유하는 이들은  사회의 ‘프로그래머’가 될 것이고, 아직 문자로 사유하는 이들은 사회 속에서 ‘프로그래밍 당하는 자’의 처지로 떨어질 것이다.

◉연속과 단절
데카르트는 존재를 ‘연장실체’와 ‘사유실체’로 나누었다. 물리적 세계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연속적이다. 반면 데카르트는 사유에 ‘명석판명함’이라는 규준을 부여한다. 사유를 이루는 관념들은 그 자체로 분명해야 하고 다른 것과 뚜렷이 구별되어야 한다. 한 마디로 사유는 불연속적이다. 때문에 세계와 사유 사이에는 연속과 불연속의 대립이 존재하게 된다. 이는 물론 문자와 숫자 모두에 적용된다. 17세기 이후 인간은 자연을 수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세계를 숫자로 번역할 때 부딪히는 문제는 세계의 연속성과 숫자의 단절성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숫자들 사이의 간극을 메워야 하는 이 난제는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만든 미적분학으로 해결된다. 이로써 자연의 모든 현상은 남김없이 수로 번역될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이 열린다. 이 이론적 가능성은 물론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실천적 가능성의 토대기 된다. 하지만 미분방적식은 그 계산의 복잡함 때문에 실제의 경우 응용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자연의 수학화는 순수 이론적 가능성으로만 존재일 뿐, 아직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아직 권력으로 전화시켜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0과 1의 디지털 코드로 짧은 시간 안에 무수히 많은 연산을 해내는 컴퓨터가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해결되기에 이른다.

 

 

◉분석과 종합


컴퓨터의 등장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첫째, 이제까지 인간의 지성능력 중에서 최고의 것으로 여겨졌던 수학적 사유를 기계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이제 계산하는 능력은 더 이상 인간의 격조에 어울리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인간은 새로운 과제, 즉 직접 계산을 하는 게 아니라 계산기를 프로그래밍하는 과제, 다시 말하면 숫자의 우주를 구조적으로 분석하는 과제를 갖게 된다.
둘째, 이 계산기는 단지 계산만 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종합(komputieren)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컴퓨터는 자연의 모든 현상을 분석하여 0과 1로 분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다시 조합하여 새로이 형상을 합성(synthetisieren)할 수도 있다. 이때 ‘디지털가상’이라는 것이 탄생한다. 이미 우리는 삶의 상당 부분을 0과 1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 속에 보내고 있다.
하지만 플루서가 말하는 디지털 가상이 그저 컴퓨터 모니터 위의 이미지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계산적 사유는 세계를 미립자로 분해(analysieren)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다시 종합(synthetisieren)한다. 생물은 미립자로, 유전자로 분석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공적인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 유전자기술을 통해 다시 새로운 생명정보로 종합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유전작 조작을 통해 생명을 디자인하고 있지 않은가.

 


◉디지털 가상


앞에서 플루서는 모든 것이 가상임을 암시한 바 있다. 가령 데모크리투스에게 우리가 보는 세계는 가상이고, 그것의 본질은 원자의 배열이었다. 오늘날의 물리학 역시 세계는 미립자로 이루어졌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보는 사람, 동물, 식물, 기계, 산과 바다로 보는 모든 것이 실은 우리의 감각에 나타난 가상일 뿐, 그것들의 실상은 미립자의 조합일 뿐이다. 여기서 플루서는 매우 급진적인 명제를 내놓는다.
“이렇게 모든 것인 기만을 한다면, 모든 것이 디지털가상이라면--컴퓨터 모니터 위의 합성 영상 뿐 아니라 이 자판과,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과 그 손가락을 통해 표현되는 생각들까지--, 그렇다면 ‘가상’이라는 말은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남은 것은 모든 것이 디지털이라는 사실, 모든 것이 비트(bits)의 촘촘한 분산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모니터 위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모니터 자체도 실은 비트의 분산일 뿐이다.
이로써 플루서는 “현실적”이라는 개념을 상대화한다. 즉 가상과 현실 사이에 질적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그 차이는 그저 양적 차이에 불과하다. 어떤 것의 분산이 촘촘할수록 더 현실적이고, 그것의 분산이 듬성듬성할수록 더 잠재적이다. 한 마디로, 가상과 현실의 차이는 해상도 차이라는 것이다. 이미 컴퓨터는 시각과 청각만이 아니라 촉각, 후각, 미각까지 갖추어가고 있으며, 언젠가는 사물의 영상만이 아니라 사물 자체를 스캐닝하여 전송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림에서 문자로

아직 문자가 없던 시절에 인류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형상을 만들었다. 구석기 시대의 인간들은 풍만한 여인의 조각을 만들었고, 동굴의 벽에 벽화를 그려 남겼다. 문자가 발명되면서 인류는 이제 세계를 그리는 게 아니라, 문자로 기술하게 된다. 이로써 역사라는 게 시작된다. 문자문화는 인쇄술과 더불어 정점에 도달한다. 그러다가 전자 매체의 등장과 함께 구텐베르크 은하는 서서히 종언을 고하고 있다.
선사시대에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상징형식은 ‘주술’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선사시대의 인류는 이미지(조각, 동굴벽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주술이 실제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다시 낯설어진다. 이 낯설음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문자’와 ‘숫자’다. 이제 인간은 세계를 주술적으로 상상하는 게 아니라 철학적,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책은 자연의 거울로 여겨졌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 텍스트가 세계의 모상이라는 생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중세인은 천동설을 세계의 모상으로 여겼다. 하지만 천동설은 세계의 참된 모상이 아니라, 그저 중세인의 주관적 관념을 투사한 모형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오랫동안 뉴튼 물리학은 세계의 모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이후 뉴튼의 것 역시 세계의 참된 모상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모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문자에서 그림으로

우리가 지금 세계의 참된 ‘모상’이라 믿는 과학이론들 역시 언젠가는 그저 하나의 ‘모형’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오늘날의 지적인 세계에서는, 예컨대 ‘빅뱅 과 같이 우리가 지금 세계의 모습이라 믿고 있는 것들이 실은‘지금 투사했다가 나중에 회수할 수도 있는’ 하나의 투사(Projekt)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존재한다. 텍스트는 더 이상 자연의 모상이 아니다. 문자로 매개됐던 세계와 인간의 관계는 다시 낯설어졌다.
이 낯설음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그림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문자문화 이전의 선사시대의 그림과는 차원이 다르다. 원시인의 조각이 3차원이라면, 벽화는 2차원의 형상이다. 문자로 된 텍스트는 1차원의 선형적 구조로 되어 있다. 문자 이후에 등장한 이미지는 픽셀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0차원의 형상으로, 문자이전의 이미지와는 추상의 수준이 다른 것이다. 체→면→선→점으로 갈수록 추상은 고도화한다.
플루서는 이 새로운 이미지를 ‘기술적 형상’이라 부른다. 그것은 문자문화 이전의 ‘주술적 형상’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물론 가상과 실재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주술적 형상과 기술적 형상은 성격이 유사하다. 하지만 주술은 주관적 상상에 불과하나, 기술은 객관적 현실이 될 수 있다. 오늘날 가상은 테크놀로지에 힘입어 객관적으로 현실이 되고 있다. ‘대안적 세계’를 만들어내는 현대의 상상력은 테크놀로지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기술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주체에서 기획으로

가상과 현실을 구별하는 플라톤주의는 이로써 종말을 고한다. 가상과 현실을 뚜렷이 구별하고, 가상을 가상으로 폭로하는 것이 철학의 오랜 과제였다. 하지만 가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가상이 되는 시대에 이 낡은 존재론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는다. 플루서의 것은 상상한 것이 테크놀로지의 힘입어 곧바로 현실이 되는 시대의 디지털 존재론이다. 새로운 존재론은 새로운 ‘인류학’을 요구한다.
플루서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디지털 분산’으로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서로 교차하는 인간관계의 교차점으로 봐야 한다. 컴퓨터란 그 엄밀한 계산적 사유를 이용하여 인간 내적 가능성, 인간 사이의 가능성, 인간 밖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도구다. 주어진 세계(Datum)는 사리지고 그 자리에 만들어진 세계(Faktum)가 들어서고 있다. 오늘날 전통적인 의미의 ‘객체’(Objekt)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객체(Objekt)가 사라지면, 그것의 논리적 상관자인 주체(Subjekt) 역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칼 마르크스는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 말했다. 주체는 객체를 인식하고, 거기서 발견한 법칙으로 세계를 변형시킨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인간의 개념은 이미 낡았다. 문제는 이미 있는 세계를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없는 세계를 기획하고, 테크놀로지에 힘입어 그 상상을 객관적 현실로 실현하는 것이다.

 

 

 

 

◉플라톤에서 니체로


이렇게 대안적 세계를 디자인하는 인간은 더 이상 주체(Subjekt)라 부를 수 없다.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객체를 인식하고 변형하는 주체(Subjekt)가 아니라, 자기가 상상한 대안적 세계상을 앞으로(pro) 던져서(ject) 기술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기획(Projekt)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는 기술적 상상력을 갖춘 창의적 존재, 즉 상상력과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대안적 세계의 프로그래머다. 그는 제 몸 안에 예술과 과학을 하나로 통합한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도록 강요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상황을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헤쳐 나가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주체일 수 없다. 더 이상 객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주체’라는 철없는 환상을 벗어버리고 넓게 열린 가능성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플루서가 말하는 것이 니체주의의 디지털 버전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니체가 말한 운명애(amor fati)를 연상시키는 어조로 플루서는 우리 인간에게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해 용감하게 걸음을 내딛으라고 요청한다. ‘디지털가상’은 우리 주위와 내부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공허의 밤을 밝혀주는 빛이다. 우리는 그런 무(無)에 대항하기 위하여(gegen) 그 무(無) 속으로(in) 자신을 투사(기획하는) 전조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