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게임의 놀이적 맥락과 환상성
이용욱(전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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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온라인 게임의 놀이적 맥락 3. 온라인 게임의 환상성 4. 나오는 물 |
1. 들어가는 말
컴퓨터게임과 관련한 가장 첨예한 논쟁은 컴퓨터게임을 ‘놀이’로 볼 것인가, ‘서사’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카오 고우이치는 게임을 ‘놀이를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반면, 박동숙과 전경란은 ‘플레이어의 적극적인 참여와 조작에 기반한 상호 작용 텍스트이자 동시에 특정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야기물’이라고 정의 내리면서 게임의 서사적 측면을 강조하였다.1) 이 논쟁이 첨예(尖銳)한 것은 놀이와 서사가 서로 대립되는 길항관계(拮抗關係)를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놀이와 서사의 길항성을 주장하는 이정엽은 컴퓨터게임의 완성형 서사나 오프닝 동영상에서 보여주고 있는 내러티브를 스토리의 전사(前史,prehistory)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는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전사의 내용을 모르더라도 게임을 즐기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다자인 되었고, 사용자는 게임을 통해 서사적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놀이의 욕구를 충족하는데 열중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게임은 놀이의 구조를 기본 원리로 삼아 진행되며, 스토리는 이에 길항 관계로 작용한다는 것이다.2) 이정엽의 주장은 PC게임이나 패키지게임만을 분석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본다면 타당성이 있으나 온라인게임으로 확대해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2005년도 게임백서>를 보면 유저들이 게임 선택의 결정 요소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게임의 장르이며, 게임 이용 시 가장 관심 있게 보는 부분은 스토리인 것으로 설문 조사 결과가 나와 있다.3) 장르와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컴퓨터게임이 기본적으로 지니는 서사 구조에 유저들이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게임의 유저들은 전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온라인 게임의 장르는 ‘판타지’ ‘무협’ ‘역사물’ ‘격투’ ‘스포츠’ 등 다양한데 유저들은 주로 한 가지 장르의 게임에 열중한다. 판타지를 좋아하는 유저들은 <리니지>나 <뮤> <WOW>에 몰려 있고, 무협에 관심 있는 유저들은 <영웅온라인>이나 <열혈강호>, <디오> 같은 게임을 주로 한다. 온라인 게임을 선택하는데 있어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이야기를 세계관으로 삼고 있는가 없는가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평소에 판타지소설이나 애니메이션을 즐겼던 유저가 무림 고수가 되어 강호를 활보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사의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모르더라도 최소한 게임의 세계관이 무엇인가는 유저들에게 중요하다. 자율형 서사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그 출발점을 완성형 서사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무협온라인 게임인 <열혈강호>의 유저들은 이 게임이 무림 고수가 되어 강호를 평정하는 것을 기본 서사로 삼고 있음을 알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놀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무협온라인 게임의 서사에 충실한 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놀이와 서사는 길항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보아야 한다. 놀이는 서사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방식이며, 서사는 놀이의 완성도를 높이고 몰입도를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4) 온라인 게임이 놀이에 서사를 접목한 것인지 서사에 놀이를 접목한 것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원시종합예술이 카니발(축제)에서부터 시작된 것처럼, 문학이 노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처럼, 예전부터 놀이와 예술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음을 염두에 두어보면 온라인게임이 새로운 형태의 서사예술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2. 온라인 게임의 놀이적 맥락
인터넷에는 다양한 놀이문화가 존재한다. 온라인 게임도 그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게시판을 통한 소통형 놀이, 댓글을 통한 참여형 놀이, 채팅을 통한 대화형 놀이 등과는 달리 온라인 게임은, 전통적 혹은 관습적 의미의 ‘놀이’로부터 많은 부분 벗어나 있다. 소통과 참여와 대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통합형 놀이>이며, 놀이로서의 즐거움이 이야기로부터 출발하는 <서사형 놀이>이며,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진행형 놀이>이다.
온라인 게임의 디지털 놀이로서의 특징을 살펴보려면 먼저 아날로그 놀이에 대한 이론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놀이에 대해 논의한 대표적인 학자로 호이징가(Johan Huizinga)와 카이와(Roger Caillois)가 있다.
먼저 호이징가가 내린 놀이의 고전적인 정의부터 살펴보자.
놀이라는 형식의 특징을 간략하게 종합해보면 그것은 어떤 자유로운 행위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행위는 진심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일상 생활 밖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그럼에도 놀이하는 사람을 강렬하게 그리고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다. 이 자유로운 행위는 어떤 물질적인 이해관계도 없고, 어떠한 이익도 얻을 수 없으며, 또한 그 행위는 질서 정연한 어떤 고유한 법칙에 따라 고유의 고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다.5)
이 정의에서 호이징가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놀이가 고정된 시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행위라는 점이다. 언뜻 보면 디지털 놀이인 온라인 게임에도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터넷이 질서정연한 고유한 법칙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온라인게임 역시 확정되고 강제적인 룰에 의해 놀이가 진행된다고 볼 수 없다.6) 물론 게임 프로그래밍은 확정되고 강제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 유저들이 만들어내는 자율형 서사들은 분명 비선형적이며 불확정적 영역이다. 놀이가 고정된 시공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온라인 게임에는 적용되지 못한다. 온라인게임은 현실(행위자의 시공간)과 가상(행동자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가상과 가상을 넘나든다. <리니지2>의 ‘바츠해방전쟁’ 당시 타 서버의 유저들이 혁명군을 돕기 위해 대거 바츠 서버로 이동한 것은 온라인 게임의 놀이 시공간이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7) 넓게 보면 34개의 서버 모두 <리니지2>의 게임 공간이지만, 그것이 개별적인 34개의 시공간을 갖고 있다는 온라인게임의 시공간이 갖는 디지털놀이로서의 특징이다.
카이와의 연구는 호이징거의 저작 ������호모 루덴스������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서 출발한다. 카이와는 호이징거가 운에 맡기는 우연 놀이와 탐닉을 즐기는 현기증 놀이를 배제했기 때문에 놀이에 대한 분석을 완결지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저서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에 대한 사회학적인 분석과 동시에 놀이의 형태 변화를 소재로 해서 현대 사회의 변화 과정을 추적하였다. 이것은 놀이가 문화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문화를 창조하기도 한다는 카이와의 발견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카이와는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를 문화현상으로 인식했으며, 모든 형태의 문화는 그 기원에서 놀이 요소가 발견되며, 인간의 공동 생활 자체가 놀이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놀이를 네 가지의 범주로 분류하였다.
첫 번째는 아곤(경쟁)이다. 규칙도 있고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아곤은 규칙에 입각한 경쟁의 놀이이이기 때문에 운동경기에서 볼 수 있듯이 상대적 경쟁을 통해 자신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이 표현하는 놀이이다. 순위(Ranking)와 명성(Reputation)이 중요하며 체스나 바둑, 스포츠 등이 해당한다.
두 번째는 미미크리(모의)이다. 규칙은 없으나 의지를 반영하는 놀이이다. 흉내내거나 가장하여 노는데 규칙이 있을 수 없지만 어떤 것을 따라하고 싶은 의지가 반영되는 놀이의 개념이다. 놀이하는 자가 가면을 쓰거나 가장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일어나는 결과가 즐거움을 일으킨다는 것이 미미크리의 재미의 원리이며 정체성(Identity)과 외적인격(Persona)의 표현이 중요하다. 가면무도회, 연극, 소꿉장난, 시뮬레이션 게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세 번째는 알레아(운)이다. 규칙은 있으나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 것이다. 아곤과는 정반대로 놀이하는 자에게 달려있지 않은 결정, 그가 전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결정에 기초하는 모든 우연 놀이이다. 아곤(경쟁)의 경우는 경쟁자들 간의 기회를 평등하게 하는데 모든 주의를 기울인다면, 여기서는 위험과 이익의 균형을 빈틈없이 잡는데 모든 주의를 기울인다. ‘운수대통이다’거나 ‘또 해야지’로 이어지는 기대심리는 또 다른 '운'을 기대하면서 놀이에 끊임없이 몰입하게 하도록 막연한 쾌감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우연놀이는 요행을 바라는 기대심리로 질 때 가장 강한 중독성을 갖는다. 복권, 룰렛, 주사위 등이 대표적인 알레아 놀이이다.
마지막으로 일링크스(현기증)이다. 규칙도 없고 의지도 반영되지 않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지각의 안정을 파괴하고 맑은 의식에 일종의 기분 좋은 패닉 상태를 일으키려는 시도로 이루어져 있다. 일상에서 구조화된 안정적인 사고의 패턴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날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아찔함과 같은 것으로 이른바 ‘끝내준다!’라고 외칠 수 있게 지각의 혼란을 야기하는 즐거움을 주므로 이런 놀이들은 현기증을 유발한다. 운의 정도가 클 때도 일링크스의 현상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롤로코스트, 번지점프를 예로 들 수 있다.8)
카이와의 주장 중에서 흥미로운 점은 ‘경쟁 놀이’와 ‘우연 놀이’의 결합과 ‘흉내내기 놀이’와 ‘현기증 놀이’의 결합으로 놀이를 크게 양분한 다음 그들의 교체 출현으로서 역사 시대를 구분한 것이다. 경쟁 놀이와 우연 놀이가 결합한다는 것은 한편에서 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경쟁의 결과에 승복한다는 것은 운에 승복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자는 무리 없이 결합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원시 시대에는 흉내내기 놀이와 현기증 놀이의 결합이 지배적이었다. 아직까지 인간들은 경쟁을 통해서 자신의 지위를 변동시킨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근대사회에 들어와서 인간들은 경쟁 놀이를 시작했다. 그와 아울러 우연 놀이도 체계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카이와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흉내내기 놀이와 현기증 놀이의 결합이 다시 성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근대적 사회의 해체의 출발로 보았다.9)
그렇다면 온라인게임은 카이와의 놀이 분류 중 어디에 해당하는 것일까? 온라인게임은 카이와가 분류한 네 가지 놀이 속성 모두를 가지고 있다. 캐릭터를 만들어 현실의 ‘나’와 전혀 다른 분신(아바타)을 통해 새로운 일상을 경험한다는 온라인게임의 기본 속성은 미미크리(흉내내기)이다.

- <리니지2> 유저가 북구 신화 속 엘프를 흉내내고 있다 -
레벨업을 하고 유니크 아이템을 모으고 능력을 향상시켜 타자와의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온라인 게임의 욕망은 아곤(경쟁)이다.
- 격투 온라인 게임인 <권호>에서 유저가 실시간으로 자신의 랭킹을 확인하는 모습 -
아이템과 룬을 조합하여 더 좋은 룬워드 아이템을 만들려고 시도하거나(디아블로2) 아이템에 젤을 발라 능력을 업그레이드 시키고자 노력하는(리니지1) 것은 번번이 실패하고 좌절하기 때문에 위험과 이익의 균형 사이에서 흔들리는 알레아(운)이다.
- <리니지1>에서 아이템에 젤을 발랐다가 실패한 모습 -
게임 속 가상 공간에서 현실 공간으로 일시적으로 빠져나왔을 때, 또는 그 반대의 경우에 유저가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은 일링크스(현기증)다. 자신이 정말로 갖고 싶었던 아이템을 몹이 드롭(drop)하거나 무수한 실패 끝에 아이템 조합에 성공하거나 실패했을 때에도 일링크스 현상은 발생한다.
<디아블로2에서 유저가 사냥 중에 원하던 아이템을 구하는 모습>
3. 온라인 게임의 환상성
온라인게임의 환상성은 게임 텍스트 밖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게임 텍스트 내부에서 만들어진다. 게임 텍스트 내부는 거대한 가상 공간인데 문학 텍스트가 창조해낸 허구적 공간과 달리 행위자와 텍스트 사이에 심리적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 실재 세계의 완벽한 모사물이다.
게임 시나리오 기획자를 ‘작가’로 놓고 게임 행위자를 ‘독자’로 설정한 후 텍스트의 창작과 독서 과정을 ‘가상공간’을 축으로 살펴보면 온라인게임의 환상성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發顯)되는지를 맥락화할 수 있다.
현실 공간과 상반되는 개념인 가상 공간은 비물질성을 지닌 비트(bits)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실재하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처럼 인지되는 시뮬라크르한 구조물이다. 가상 공간의 시뮬라크르한 맥락은 독자들의 문학적 기호를 기시감이라는 의식의 자장권 내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구속한다. 기시감은 일차적으로 독서 행위 과정 중에 나타난다. 가상 공간 안에서 독자들은 ‘언젠가’ ‘어디선가’ 이미 읽어본 듯한 무수한 텍스트들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가상 공간이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구조된 현실 공간과는 달리 이미지의 세계이며, 독자들은 자신들이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던 독서 경험을 또 다른 이미지와 겹쳐 읽기 때문이다. 작가들 역시 자신들의 상상력을 독창성보다는 상호스트성에 의존하고 있다. 가상 공간의 작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획득한 정보를 새로운 방식으로 배열하는 것이다. 이때의 새로운 배열이란 따로 떨어져 있는 일련의 자료를 자신의 의도대로 결합·접합하는 능력을 말하며, 텍스트에 대한 독자들의 기시감은 결합과 접합에 대한 기억의 이미지이다. 가상 공간이라는 새로운 자연을 재현하고자 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은 창조적인 능력보다는 패러디와 패스티쉬를 동원한 상호텍스트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가상 공간 자체가 현실 공간과 끊임없이 상호텍스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상 공간 내에서 독자들의 끊임없는 기시감은 현실 공간에서의 독서 경험과 겹쳐짐에서 기인하며, 작가들이 텍스트 안에 의도적으로 펼쳐놓고 있는 형식적인 틀 역시 이미 현실 공간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온라인게임의 환상성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온라인게임의 환상성(幻像性)은 네 가지 측면에서 형성된다. 먼저 게이머들은 자신이 처음 접하는 온라인게임의 가상 공간을 전혀 낯설게 느끼지 않는다. <기시감의 법칙>이다.

MMORPG 게임인 <아크로드>에 처음 접속한 게이머는 드넓은 칸트라 대륙의 한 지점에 던져진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초보인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익숙하게 처리한다. 마을 상점에 들려 초보용 아이템을 사고, 퀘스트를 부여받고, 마을 밖으로 나가 사냥을 한다. 물론 온라인 게임이 처음인 유저라면 무엇부터 해야 할 지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게이머의 조언이나 홈페이지에 마련된 초보용 길잡이 등을 통해 그는 금방 낯선 세계에 적응한다. 이 같은 일련의 행위들은 “내가 낯선 세계에 홀로 던져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상황 판단의 자동 반응이다. 게이머는 가상 공간에 처음 발을 내딛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언젠가 한번 경험해 봄직한 기시감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는 온라인게임이 구현해 놓은 세계가 가짜이거나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로 인식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두 번째는 가상 세계에서의 일상이 현실의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일상의 법칙>이다. 판타지 소설이 리얼리티를 갖는다면 그것은 시공간의 배경이나 스토리 전개에서가 아니라 텍스트 안에 인물들이 현실 공간의 우리들처럼 사랑하고 분노하고 질투하고 슬퍼하는 일상적 감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게임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게임의 공간은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신화적 공간이거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절정 고수들이 활동하는 무림의 세계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서 게이머는 여전히 인간의 위치를 고수한다. 인간의 위치를 고수하기에 ‘엘프’이면서도 인간처럼 행동하고 ‘드워프’이지만 인간처럼 생각한다. 다른 게이머와 파티플레이를 하고 필드에 나가 사냥하고 레벨을 올리는 게임 속 일상은 대인 관계를 맺고 직업을 구하고 돈을 버는 현실의 일상과 중첩된다. 어쩌면 이 ‘중첩(重疊)’이라는 심리적 효과 때문에 게임이 심한 중독성을 갖게 됐는지도 모른다.10)


<리니지>에서는 게이머들 간에 결혼식이 종종 있다. 플레이하면서 서로가 맘이 통해 그것이 사랑의 감정으로 확대되는 경우이다. <리니지>에서의 결혼식은 현실의결혼식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결혼식장이 마련돼 있고, 주례 선생님도 있으며, 축하해 주기 위해 하객들도 참석한다. 물론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신부가 현실에서는 둘 다 남자일 수도 있고, 결혼을 이미 한 기혼자일 수도 있고, 나이차가 너무 나 도저히 결혼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온라인게임의 환상성은 현실의 그런 조건들을 모두 지우고 그 위에 일상성을 재위치 시킨다.
세 번째로 온라인게임의 환상성은 <욕망의 법칙>을 보여준다. 현대이론과 비평에서 판타지라는 말의 통상적인 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용법은 작중의 사건이 터무니없는 가공의 세계에서 일어나거나 초자연적인 성질을 띠거나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한 예상을 대개 무시하는 문학작품을 일반적으로 일컫는다. 둘째 좀 더 전문적인 용법은 정신분석에서 나온다. 정신분석에서 판타지는 대체로 '백일몽'과 동의어로 검열기제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의식이 상상과 욕망을 자유로이 활동하게 놓아두는 명상의 상태를 말한다. 정신분석에서 판타지는 백일몽과 같은 의식적 판타지와 정신분석이 드러내고자 하는 억압된 욕망의 표현인 무의식적 판타지 모두를 가리키는데 쓰인다.11) 온라인게임의 <욕망의 법칙>은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의 가상적 해소이다.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게이머가 온라인게임의 환상성을 탐닉할 여지는 높아진다. 남보다 강해지고 싶고, 더 좋은 아이템을 획득하고 싶고, 자신에게 해를 입힌 타자에게 복수하고 싶은 욕망은 기실 현실의 욕망과 일란성 쌍둥이이다. 게이머들이 온라인게임의 환상에 몰입하는 이유는 일상의 욕망과 환상의 욕망이 겹쳐지면서 게임의 일상을 현실의 일상으로 치환시키는 <욕망의 법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법칙>이 표면화된 세계를 보여준다면 <욕망의 법칙>은 그런 일상을 조직화해내는 무의식적인 효과이다.

<리니지1>에는 유저와 유저 사이에 아이템을 사고 파는 시장이 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파는 사람은 좀 더 높은 가격에 팔고 싶어 하고, 사는 사람은 좀 더 낮은 가격에 사고 싶어 한다. 당연히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전문 상인들도 등장하였다(여기까지는 <일상의 법칙>이다). 이들 상인들 중 일부는 아덴(리니지의 화폐 단위)을 벌기 위해 비정상적인 상행위를 일삼기도 하는데 ‘매매사기’가 대표적이다.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산다거나 산다고 한 가격보다 적은 아덴을 지불하는 경우이다. 자본주의의 세속적인 욕망이 아이러니하게도 선과 악의 대립을 구현하는 로망스(romance)의 공간인 가상 세계에 고스란히 투사된 것이다.
기란성 마을은 (무역도시.... 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많은 유저들의 시장 중심의 거점이 되는 장소이다.
팔고 사는 거래가 왕성한 만큼, 시세 격차가 심한... 매매 사기가 극성을 부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루나서버의 기란성 마을은 매매의 몇몇 구역이 암묵적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 정탄 골목 (주로 기란성 마을을 빠져나가는 북문 쪽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2. 타우린 창고 주변~정탄골목 : 개인 구입상점/ 기초재료 공방상들
3. 기란성 마을 광장 기둥 쪽으로 : A급 이하의 공방상인들
4. 크라비아 텔녀 주변으로 : 데이, 젤 개인상점
5. 기란신전 입구 앞과 주변에 : 법서 개인상점
6. 그 외 넓게 분포한 모든 구역의 판매, 구입 개인 상점 등으로 나뉘고 있다.
특히 사기 행각이 주로 이루어 지는 곳은,
1. 정탄골목 ( 예 : B정탄을 세 자리수로 팔고 있다...;;)
2. 타우린 창고 주변~정탄골목 : 개인 구입상점 (상점 구입가보다 싸게 사고 있다. 뭐냐...;;)
3. 데이, 젤 개인 판매 상점 (예 : B데이 : 2천만, C데이 D데이도 몇백만 아덴씩;;;;)
정도로,
많은 장사진들 속에 섞여 격차가 심한 물건을 팔고 있다는 것. ㅡㅡ;
일부 유저들이 아덴으로 1원씩 표시를 해놔도,
그것을 주어먹는 캐릭이 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사기 행각을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주어먹는) 사실상 사고 팔 때 유저가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이 지금의 실태.12)
‘사기’야 말로 일상의 욕망이 게임의 욕망을 뒤덮은 사례이다. 뒤덮었기 때문에 두 욕망은 구분되지 않고 섞여버리게 되고, 이것이 온라인게임의 환상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13) 두 공간이 모두 동일한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에 현실 공간과 가상공간은 구분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온라인게임의 환상성은 <창조의 법칙>을 갖는다.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세계에서 게이머는 주인공이다. 문학에서 독자는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주인공 뒤를 쫒아가는 관찰자일 뿐이다. 서사를 새롭게 창조해나가면서 그 세계를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만들어 나가고 있는 세계가 현실이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런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서사는 실재 현실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고 결국은 허구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온라인게임의 유저들은 모두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가 실재와 다르지 않다고 확신한다.

위 화면은 <아크로드> ‘베스트 추천 유저 스크린샷’ 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그림이다. 그림 밑에 다음과 같은 사연이 올려져 있다.
제목 : 집 나간 색시를 공개 수배 합니다.
얼굴 잘 보시고 혹 보시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1년 전에 찍었던 신혼여행사진입니다.
마지막으로 색시가 이사진을 볼 수 있다는 믿음
의심치 않으며....
"색시야 은날개 바꿔줄게, 어여 내 곁으로 돌아와라.."
"그땐 돈 없어서 못사줬지만 이젠 너가 그렇게 좋아했던
은날개 사놨어 어여 내 곁으로 돌아와ㅠㅠ"
사랑하는 남편이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어요.
글을 올린 아이디 xx5289는 같이 플레이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긴 다른 유저를 찾으면서 집을 나간 것으로 임의로 판단하였다. 상대방이 사정이 생겨 게임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을 수도 있고, 워낙 넓은 가상 공간이라 미처 못 만났을 수도 있건만 xx5289는 자신을 중심으로 서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은날개를 사 주지 못해 아내가 집을 나갔고 이제는 그것을 사줄 수 있는 여력이 생겼으니 그만 돌아오라”는 신파조의 이 글은 서사의 창조가 어떻게 환상성과 밀착되어지는 가를 잘 보여준다.
현실 세계에서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며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살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중요하고 결혼해서는 가족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도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은 온라인게임을 통해 보상받는다. 그래서 유저들은 그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주인공인 유일한 세계에서 그는 현실세계에서 받은 상처를 달래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 위안을 얻고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삶의 희열을 느낀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면서 그것을 현실이라고 믿고 싶은 게이머의 욕망이 온라인의 환상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온라인게임의 환상성은 문학의 환상성과 다르다. 환상(幻想)과 환상(幻像)의 차이는 아날로그 서사와 디지털 서사의 거리이다. 온라인게임이 보여주고 있는 환상(幻像)적인 세계와 그것을 통해 구현되는 미적 체험을 ‘가상성(假像性)’과 ‘버추얼 리얼리티’라 명명할 수 있다. 온라인게임의 환상성을 통해 서사예술의 미적 범주와 가치체계는 한층 더 확장되게 될 것이다.
4. 나오는 말
현대에 와서 흉내내기 놀이와 현기증 놀이가 주류 놀이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경쟁놀이와 우연놀이의 시대였던 근대를 해체시켰다는 카이와의 주장을 확장해보면 흉내와 경쟁, 우연과 현기증 모두를 다 놀이의 속성으로 갖고 있는 디지털 놀이의 등장은 현대를 해체시키고 정보화사회로 이행되어가고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보화 혁명을 통해 새롭게 등장한 인터넷은 우리에게 놀이의 주체로서의 권리를 다시 되돌려 주었다. 온라인 게임은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놀이 문화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관습적인 놀이에서 나이와 성별은 놀이의 장르를 구분 짓는 중요한 표지이다),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으며(현실 공간 안에 놀이 공간이 구획되어 있기 때문에 관습적인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현실과 동일하게 경험한다), 일상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휘발되는 서사이기 때문에 관습적인 놀이는 항상 억압된 일상으로 복귀하여야 한다. 관습적인 놀이는 놀이와 일상 사이에 틈이 있지만 온라인 게임은 놀이가 곧 일상이다. 물리적인 공간으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된 의식 공간 위에서 놀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놀이는 누적되며 그래서 일상이 된다) 진정한 놀이이다.
동시에 이 혁명적인 놀이는 단순한 놀이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서사 양식이기도 하다. 작가와 독자가 있고(비록 게임 공간 내에서는 그 구분이 무의미하기는 하지만) 풍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고 있으며, 시간성과 공간성을 갖고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온라인 게임이 문학은 아니지만 문학과 유사한 서사 양식으로서의 특질을 보여준다. 온라인 게임에 대해 우리가 학문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그것은 이 새로운 놀이문화가 ‘서사’이기 때문이며, 서사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해 문학 연구자들의 영원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국문 요약>
본 논문은 온라인 게임이 놀이로서 갖는 맥락을 살펴보고 놀이 경험을 통해 유저가 경험하는 환상성의 특징을 목록화, 구체화할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인터넷에는 다양한 놀이문화가 존재한다. 온라인 게임도 그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게시판을 통한 소통형 놀이, 댓글을 통한 참여형 놀이, 채팅을 통한 대화형 놀이 등과는 달리 온라인 게임은, 전통적 혹은 관습적 의미의 ‘놀이’로부터 많은 부분 벗어나 있다. 소통과 참여와 대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통합형 놀이>이며, 놀이로서의 즐거움이 이야기로부터 출발하는 <서사형 놀이>이며,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진행형 놀이>이다.
인터넷은 우리에게 놀이의 주체로서의 권리를 다시 되돌려 주었다. 온라인 게임은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놀이 문화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관습적인 놀이에서 나이와 성별은 놀이의 장르를 구분 짓는 중요한 표지이다),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으며(현실 공간 안에 놀이 공간이 구획되어 있기 때문에 관습적인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현실과 동일하게 경험한다), 일상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휘발되는 서사이기 때문에 관습적인 놀이는 항상 억압된 일상으로 복귀하여야 한다. 관습적인 놀이는 놀이와 일상 사이에 틈이 있지만 온라인 게임은 놀이가 곧 일상이다. 물리적인 공간으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된 의식 공간 위에서 놀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놀이는 누적되며 그래서 일상이 된다) 진정한 놀이이다.
동시에 이 혁명적인 놀이는 단순한 놀이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서사 양식이기도 하다. 작가와 독자가 있고(비록 게임 공간 내에서는 그 구분이 무의미하기는 하지만) 풍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고 있으며, 시간성과 공간성을 갖고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온라인게임의 환상성은 네 가지 측면에서 형성된다. <기시감의 법칙>, <일상의 법칙>, <욕망의 법칙>, <창조의 법칙>등을 통해 형성되는 온라인 게임의 환상성은 문자에 의지하는 문학의 환상성을 뛰어 넘어 전혀 새로운 미적 경험을 유저들에게 제공해 준다.
온라인 게임이 문학은 아니지만 문학과 유사한 서사 양식으로서의 특질을 보여준다. 온라인 게임에 대해 우리가 학문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그것은 이 새로운 놀이문화가 ‘서사’이기 때문이며, 서사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해 문학 연구자들의 영원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1) 이인화 외 공저, ������디지털 스토리텔링������, 황금가지, 2003, p.96.
2) 앞의 책, p.84.
3) 지티스 - 게임산업종합정보시스템(http://www.gitiss.org/index.jsp)에서
4) 특히 놀이가 근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한정을 받고 어떤 형태로던 결말을 가져야 한다는 한계를 서사를 접목시킴으로써 뛰어넘을 수 있다.
5) J. 호이징가 지음, 김윤수 옮김, ������호모루덴스������, 까치, 1989. p.27.
6) 놀이터 자체가 이미 질서와 규칙을 생래적으로 거부하는 있는 것이다.
7) <리니즈2>에는 테스트서버까지 포함하여 모두 34개의 서버가 있고 바츠서버는 그중 하나이다.
8) 로제 카이와 저, 이상률 역, ������놀이와인간������, 문예출판사, 2001. (부분 요약)
9) http://blog.naver.com/hopy4u?Redirect=Log&logNo=20002303140
10)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온라인게임의 환상성은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지난 8일 오전 7시쯤 온라인 게임 '리니지'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죽인 상대에게 복수하겠다며 PC방을 찾아갔다가 엉뚱한 사람을 흉기로 찔러 중상을 입힌 30대가 경찰에 잡혔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경찰 조사에서 "(게임 캐릭터는) 또 다른 나다"며 "캐릭터를 죽이니까 내가 죽은 것 같이 느꼈기 때문에 흥분하고 화가 났다"고 밝혔다.”(마이데일리 인터넷판(2005-06-09)에 실린 기사 중 일부)
11) 조셉 칠더즈 ․ 게리 헨치 엮음, 황종연 역, ������현대 문학 ․ 문화비평 용어사전������, 문학동네, 1999, p.182.
12) 리니지2 이야기 - 기란성 마을 사기행각 | http://blog.naver.com/eruku/80017584951
13) 실제로 게임 상에서 사기를 당한 피해자가 현실공간에서 가해자를 찾아내 폭력을 행사하거나, 검찰에 고발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