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아이폰 :)
_ 아이폰은 마치 내 손과 연결된 또 다른 뇌처럼 여겨집니다.
_ 아이폰은 마치 내 손과 연결된 또 다른 뇌처럼 여겨집니다.
사용 이틀째 되던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면 ‘인문학’은 어떻게 되는 건가. 책의 미래는 당최 어떻게 되는 것인가와 같은 생각들 말입니다. 직업적인 자의식을 떠나서 원래부터 책 사는데 많은 돈을 써왔던 자인지라, 그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죠. 그리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인문학’이라는 말 그 자체가 하나의 가상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주요한 장애는 전통, “예술은 여기 있고, 과학은 저기 있다. 예술사는 이렇게 생각하고, 과학자는 저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교육이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별 문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은 융합성에 완전히 익숙했죠. 문제는 나이 든 사람들이었는데, 가령 학계에 있는 사람들이나 행정을 담당한 사람들은 두 가지가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지요. 젊은 사람들은 그런 분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진중권 엮음, 『미디어아트-예술의 최전선』, 마리넬리와의 인터뷰 중에서)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문학’이라는 말은 사실 편의상, 다른 학문들과 ‘대략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붙여놓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태초부터 이 학문은 뭐하는 학문이요, 저 학문은 뭐하는 학문이라는 구분이 없었던 바에야, 예술, 과학, 인문학 등등이 서로 섞이고, 뭐가 무엇이라고 딱히 규정할 수 없는 온갖 ‘지식-컨텐츠’들이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하는 생각까지 뻗어나가더군요. 다시 말해서 학문의 ‘분화’ 이전의 과거에는 한 사람의 신체 안에 과학자이자 철학자, 또는 소설가이자 철학자, 또는 음악가가 섞여 들어가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고, 그것이 근대적인 분화(아마 포드주의랑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후엔 너무나도 부자연스럽고, 아마추어적인 것으로 되어버린 것이죠.
마리넬리씨는 이런 말도 합니다. “그들(젊은이들)은 기술에 익숙할 뿐 아니라, 기술이 할 수 있는 일에도 익숙합니다. 왜냐하면 기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의 삶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트 위에서 음악을 듣고, 네트 위에서 비디오를 보고, 네트 위에서 친구와 부모를 만납니다”라고 말이죠. 몽상에 가까운 말이지만, 이 ‘네트’라는 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끊어진 지식의 신경망을 ‘다시’ 연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문학’, ‘인문학자’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인문학’, 하나의 동일성으로 귀착되는 ‘인문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무리 위축되더라도 인간의 ‘삶’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인문학’이 사라질 일은 없을 테고, 그런 점에서 볼 때 ‘인문학’이라는 것은 네트워크 위에 올려져야 할 무엇이지, 네트워크 밖에서 그것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할 수 있는 ‘비판자’, ‘참관자’는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앱스토어(애플이 운영하는 다운로드 서비스)
_ 어떤 지식-컨텐츠도 분화된 경계 안에 안주할 수 없게 된 거대한 지적 자원의 네트워크.
_ 어떤 지식-컨텐츠도 분화된 경계 안에 안주할 수 없게 된 거대한 지적 자원의 네트워크.
그럼 문제는 그 네트워크 위에서 인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좀더 고민이 필요합니다. 쏟아지는 디지털 미디어, 디바이스에 비해 디지털 ‘컨텐츠’는 아주 적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좀 엉뚱한 소리일 수도 있는데, 미디어는 기본적으로 ‘매체’이기 때문에 수용할 수 있는 콘텐츠의 양은 거의 ‘무한’에 가까울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가 수천년 동안 쟁여놓은 아날로그 컨텐츠는 아주 소량만 디지털화 되었을 뿐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컨텐츠 생산-소비 방식은 아직도 상당부분 아날로그적이라는 것입니다. 인류 전체가 지닌 지식의 총량과 지식생산의 역량을 보면,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앱스토어나,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아바타」같은 영화를 보면 생산양식의 전화가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 같긴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거기에 꽤나 많은 희망이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앱스토어’는 분명히 자본의 포획장치이긴 하지만, 유용한 뭔가를 개발한 사람들이 꽤나 싼 가격, 혹은 공짜에 가깝게 대단한 가치들을 자발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그러니까 ‘꼬뮨주의적 흐름’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각종 툴을 공유하고, 툴을 이용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냅니다. 직업상 저는 여기에 그린비, 인문학이 어떤 흐름을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며, 어떤 ‘접속’을 창출 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그 고민 속에서 ‘인문학’이 고래의 퀘퀘한 탈을 벗고, 새로운 양상으로 진입할 수 있을테니까요.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_ 쿠사나기는 '고스트'에 붙은 이름입니다. 그의 고스트가 담긴 뇌(혹은 전뇌)와 의체가 결합되어 위의 이미지처럼 인간적인 신체로 재탄생합니다. '나'라는 자아는 전뇌가 접속할 수 있는 정보와 네트워크 속에서 만들어지죠. 이처럼 인간화된 기계를 사이보그라고 한다면, 네트워크에 접속해 네트의 바다를 체험하고 있는 우리 역시 사이보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들뢰즈와 가타리」 발췌 편집)
_ 쿠사나기는 '고스트'에 붙은 이름입니다. 그의 고스트가 담긴 뇌(혹은 전뇌)와 의체가 결합되어 위의 이미지처럼 인간적인 신체로 재탄생합니다. '나'라는 자아는 전뇌가 접속할 수 있는 정보와 네트워크 속에서 만들어지죠. 이처럼 인간화된 기계를 사이보그라고 한다면, 네트워크에 접속해 네트의 바다를 체험하고 있는 우리 역시 사이보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들뢰즈와 가타리」 발췌 편집)
네트워크 상에서 인문학의 ‘자아’가 굉장히 다양한 양상으로 분화되고, 그 분화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에 태어난 아주 유명한 문장이 자꾸 떠오릅니다.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칼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214쪽)
- 웹기획팀 정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