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문화혁명>
(5)디지털이 만드는 새로운 지적공동체
노아와 방주의 옛 이야기를 연상케하는 ’디지털 대홍수’(digital deluge)가한 천년을 접으면서 인간세계를 다시 한번 혼돈에 빠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현실을 탈영토화하는 사이버와 디지털은 인간에게 기회의 땅인가 재앙의 씨앗인가? 그러나 불과 수년전부터 시작된 사이버 공간(인터넷망)을 둘러싼 논의는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들을 더 많이 보여주는 듯하다.

해방이념 구현되는 '뿌리줄기'의 지식공간


일단 벤처 정보산업(IT)과 전자상거래의 활성화가 디지털이란 용어의 역동적인 아우라를형성하고 있으나 사이버 공간의 지나친 상업화, 포르노화, ’쓰레기’화가 가속적으로 실현되는 현상을 간과할 수없다.게다가 많은 네티즌들이 사이버의 지평에 새로운 공적 영역을 구축하기보다는 일종의 도피와 배설의 출구로 삼으려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 가운데 최근에 이루어진 아메리카 온라인과 타임 워너사(AOL-TIME WARNER)의 합병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바탕으로 신경제의 주요 영역들의 지배자로군림하고 사이버스페이스를 자유교환의 장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빌 게이츠와 같은 인터넷 강자들은 궁극적으로 사이버 공간을 신자유주의의 이상을 구현할 기회로 해석하고 있다. 가상공간의 상업적 해석 이면에는 정보기술의 자유로운 구사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적으로 이어감으로써 은행 등 금융기관을 포함한 종래의 중간거래자들이 도태시키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그렇더라도 사이버와 디지털 공간은, 단순히 전자 상업적 공간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른, 그 정체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공간이다. 여기에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측면과 함께 부정적이고 어두운 부분도 함께 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이버 공간이란 단숨에 매도해버릴 거짓된 ’사이비’ 공간이 아니라 엄청난 동학에 의해 움직이고 생성되며 어떤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사이버와 인터넷은 ’젊은’ 개념이고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공간 구축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역사상 이토록 단시간에 많은 젊은이들의 시간과 열정을 흡인한 매체는 없었으리라. 게임매니어나 디지털 벤처사업가 등 다양한 계층의 젊은이들이 필사적으로 디지털 사이버 공간에 몰입하고 있다.따라서 그것은 복고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며 역동적인 공간이다.

디지털과 사이버는 고전적인 의미의 산업적,속지적인 인프라 개념이 아니다. 탈영토화된 인터넷 전자그믈망은 자기조직적이고 기술사회적인 프로세서로서 부단한 창의성 개발을 통해 이미 오프라인으로 존재하는 기존의 인프라 자원을 온라인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전자그믈망을 교직하는 수많은 매듭들이 어떤 중심으로 모아져 하나의 구심점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중심이 된다는 점이다. 중심은 한곳에만 있는 곳이 아니라 도처에흩어져 있게 된다. 인터넷은 뿌리줄기의 모든 점들이 다른 이질적인 점들과 연결되며여기에는 순수성에 입각한 어떤 권력적 질서도 있을 수 없다는 철학자 들뢰즈의 주장이 그대로 적용되는 공간이다.

미디어의 역사상 인터넷처럼 ’다수 대 다수’의 인터렉티브 매체는 없었다. 아날로그 통신수단인 전화는 일 대 일의 미디어이며, TV와 라디오는 일 대 다수의 매체였다. 인터넷이 TV나 라디오보다 전화에 더 가까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방향적인 미디어는 쌍방향적인 미디어보다 정보의 오도나 왜곡의 가능성이 훨씬 큰 반면, 다방향에서 쏟아지는 정보들은 원천적으로 통제 불가능하다.인터넷은 TV매체에 비해 정보왜곡현상을 신속히 리얼타임으로 자기교정하는 능력을 지니기 때문에 보다 참여민주적인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정보의 다양성과 개방된 논의는 사이버스페이스 고유의 성격이다. 물론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한 인터넷 기업들이 전세계 정보통신망을 사유화할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인터넷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횡단적 인터렉션 기능이 부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디지털이다’ 저자 네그로폰테의 정의대로 색깔도 무게도 없는 0과 1의 비트로된 디지털 메시지는 광속으로,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한순간에 뛰어넘어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기적을일으키며 공간의 소멸과 함께 실시간으로 타인과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바로 이러한 디지털의 능력으로인해 우리는 인종과 문화와 성의 차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지적 문화적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다.

들뢰즈적 표현을 빈다면, 이는 지식을 포함한 위계화된 권위조직의 붕괴를 촉발할 뿐더러 동시에 수평적 편재적 성격을 지닌뿌리줄기(rhizome)와 같은 지식 공간의 창출이 가능해진다. 마치 뿌리줄기가 땅 속에서 옆으로 뻗어나가 시작도 끝도 없이 성장하는 것처럼,인터넷 통신망은 이질적이고 주변적인 요소들이 서로 넘나드는 횡단적 연계성(transverality)을 지닌다. 따라서 디지털 공간에서는 어느 특정 집단이 지식을 전유할 수없게 되며 한번 디지털화된 지식은 소멸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함께 나눌 수 있다.

사이버 스페이스로 인해 지식공동체의 지평이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지식공동체는 새로운 지식의 유입으로 인해 실시간으로 부단히 업데이트되고 널리 배분되며 궁극적으로 인간의지적능력을 극대화시키는데 공헌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지식공동체를 통해 거대집단보다는개인이나 소집단이 수혜를 얻게 될 것이다.
이 경우 디지털 공간의 비즈니스화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고, 지식정보의 전파와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한다.(전자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더라도 일단 정보의 공개와 공유는 참여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점은 부정될 수 없다) 게다가 지금 컴퓨터가 안고 있는 상업적 기술적인 문제점들이개선된다면 (저렴한 가격과 휴대장착 가능성), 디지털은 지금보다 훨씬 우리의 일상 속에파고들어 구체적인 삶과 농밀한 관계를 설정할 것이다.

구체적인 삶에 있어서 디지털과 인간과의 농밀한 관계는 심미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펼쳐져야 한다.심미적 차원을 획득한 사이버 공간은 예술(특히 디자인과 건축)과 인문학에 의해 전혀 새롭게 태어날 수있다.탈영토화 현상으로 인해 인류가 유목민화 되어가는 시대의최대의 미덕은, 예술과 인문의 토양에서 숙성된 디지털 테크놀러지가 시장 전체주의적인 가상화를 지양함으로써 해방적이고 만인이 참여하는 사이버 공간을 만드는데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인터넷과 디지털 공간은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이 꿈꾸어 왔던 해방의 이념이 구현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개되는 양상으로 비추어 보아 디지털화나 사이버화는 부정적인 국면(지나친 상업화, 시각 중심주의, 탈육체화)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니는 지식의 민주화와 해방적인 요소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김동윤 건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