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인문학 / 연세대학원신문』, 97호(2000.5.9)]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읽는 이들은 그 책들이 본래 종이에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이 점은 논어나 맹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죽간(竹簡)에 기록되었건 양피지에 적혀 있었건 내용이 다르지 않듯이, 디지4ㅣ털 문서가 되었다해도 그것들은 여전히 고전이다. 이는 디지털이라는 기록 도구가 인문학의 본직에 별다른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짐작하게 한다. 오히려 디지털 문서의 등장은 인문학의 성장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perseus project(http://www.perseus.tufts.edu) 사이트에 가면 서양의 고전을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얼마든지 나누어 가질 수 있으며, 최근에 부쩍 늘어난 중국 고전 원문사이트들도 그러하다. 예전에는 구하기 어려웠던 외국 책들도 인터넷 서점을 통해 쉽게 손에 넣을 수도 있다.


'네트워크 혁명'의 파장

  나는 디지털이라는 도구가 인문학의 본질적 내용이나 인문학의 위상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디지털이라는 것이 인문학의 글쓰기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웬만한 컴퓨터는 다 써봤고, 지금은 인터넷 비즈니스 회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아직도 글을 쓸 때는 종이에 만년필로 쓰고, 종이 위에서 고친뒤 그걸 워드 프로세서에서 타이핑한 다음 인터넷을 통해 원고를 보낸다. 컴퓨터나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지만 생각을 글로 옮기는 과정이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생각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크게 달라진 것은 분명있다. 그건 컴퓨터나 인터넷이라는 도구 자체가 끼친 영향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일종의 관계의 변화이다. 이는 디지털이라는 것에 기인하기 보다는 네트워크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요즘의 변화는 '디지털 혁명'이 아니라 '네트워크 혁명'이고, 이것은 인문학 자체가 아닌 인문학을 하는 이들, 그들이 웅크리고 있는 집단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네트워크의 두드러진 특징은 공개성이다. 예를 하느 들어보자. 예전에 나는 계명대학 철학과 이진우 교수가『덕의 상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매킨 타이어의 책『AFTER Virtue』에 상당한 오역이 있음을 발견하였고, 그 사실을 내가 속한 피씨통신 동호회의 게시판에 글로 써서 올린 적이 있다. 짐작하건대 내 글을 읽은 사람들 중에서 그 책을 사려 했던 이들은 돈을 아끼게 되었을 것이다. 확장된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주변의 몇몇 사람만이 알고 지나갈 수 있는 것도 뜻하지 않은 전파력을 가지고 퍼져갈 수 있는 것이다.


정보 공개의 파급력

  정보의 공개가 가져다 주는 파급효과는 상당히 크다. 특히 한국처럼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굳이 인터넷이 아니어도 그 효과는 제법 오래 전부터 알 수 있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해도 학생이 외구에 나가는 일이 상당히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교수 중 몇몇은 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이나 풍취를 떠들어 대는 걸로 자시니의 위력을 과시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외국에 가 본 학생들이 제법 되기 때문이다.


  정보의 공개는 인문학이나 대학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책을 검열하고 출판사 사장이 구속되기도 한다. 그러나 맘만 먹으면 그 책은 얼마든지 인터넷을 통해 사서 읽을 수가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음란물을 단속하지만 인터넷을 통하면 국경은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이미 70년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유신 정권 때 독일에 파견된 광부나 간호사들은 독일에 간 다음에야 자신들이 얼마나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나라에서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런 자각을 바탕으로 한국의 민주화에 헌신하였다. 넓은 세상을 보게 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간헐적으로 있어왔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감을 폭발적인 수준으로 올려 놓은 것이 바로 인터넷이고 이는 이제 기존의 폐쇄적이고 구질구질한 관계망을 파괴하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해내려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처럼 기존의 관계망이 가진 힘이 워낙 강한 곳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형성 자체가 아주 고통스러운 투쟁의 과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네트워크 시대를 살아갈 인문학도는 새로운 관계망에 걸맞는 인간형으로 스스로 갱생시킬 필요가 있다. 이 관계망에 끼어들 수 있는 자격은 컴퓨터나 인터넷을 얼마나 능란하게 조작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안혹, 기존의 인간관계를 얼마나 깔끔하게 청산하느냐에 달려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인문학 연구자 집단의 수직적 줄서기에서 벗어나 객관적이고 투명한 수평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요구되는 것이다.


수직적 줄서기에서 수평적 관계로

  이러한 관계맺음이 정착되면 인터넷을 바탕으로 활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소규모 학술 공동체들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트워크의 또다른 중요한 특성인 상호작용성이다. 현재 인터넷 상에 존재하는 인문학 관련 사이트들은 대부분 기존의 단테나 모임들을 인터넷으로 옮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철학회가 홈페이지를 만들었다고 해서 한국철학회가 인터넷 시대에 적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철학회가 여전히 과거의 관행으로 운영되고 있는 한, 홈페이지에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그 집단에 별다른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지극히 폐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한 그건 무의미한 네트워크 자원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네트워크시대의 인문학적 실험

  네트워크 시대의 인문학이라해서 공부할 주제가 특별히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나 몇 가지 해볼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싶다. 요즘 인터넷 비즈니스를 하는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비즈니스 수익 모델의 핵심으로 '커뮤니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간단히 말해서 사용자들이 콘텐츠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사이트의 질을 높이며 동시에 경제적인 활동도 활발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과연 인문학도들은 이런 일에 대해서 할 말이 별로 없을 까? 그렇지 않다. 역사 이래로 커뮤니티에 대해서 가장 깊이있게 고민해온 것이 바로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국가』나 헤겔의『법철학』같은 책은 커뮤니티에 관한 최고의 책들이다. 이런 고전들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비즈니스에 나설 수 있는 힘을 인문학도들은 가지고 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이트들이 생겨나는 인터넷에서 사이트의 생명력은 콘텐츠의 완성도, 커뮤니티의 활성화 정도, 사회적 영향력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것들을 기술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수없이 많은 엔진들이 개발되었지만 그것들은 페이지 뷰, 디자인 , 링크의 적합성 등과 같은 정량적(定量的) 분석에 그칠 뿐이다. 질을 평가할 수 있는 이는 폭넓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뿐이다. 이것만 보아도 인문학도들이 인터넷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많다.


  중요한 것은 태도를 바꾸는 일이다. 가난한 인문학도라고 자학하기 보다는 떳떳하게 비즈니스에 나서고 그걸 통해서 얻어진 이익을 인문학에 투자해야 한다. 네트워크 시대의 인문학도는 한편으로는 인문학적 교양인이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적극적인 비즈니스맨이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인문학은 굴종에서 벗아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