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스토리텔링의 서사시학(1)
- 논의를 위한 몇 가지 전제 -
이용욱(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 전공)
1. 들어가는 말
디지털스토리텔링에 관한 연구는 최근 몇 년 동안 진취적인 연구자들에 의해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내고 있다. 특히 온라인게임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하이퍼텍스트>나 <웹아트>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서구의 디지털스토리텔링 연구와 비교해볼 때 매우 이례적이며 한국적인 현상이다.
디지털스토리텔링이 “디지털기술을 매체 환경 또는 표현 수단으로 수용하여 이루어지는 스토리텔링이며, 스토리를 전달하는 담화 양식이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새롭게 재구성된 것”1)이라면 그 하위 영역은 현실 공간의 모든 서사 예술 영역을 포함하여야 한다. 디지털을 매체로 하여 이루어진다면 문학, 영화, 게임, 광고 등 인간의 욕망을 서사로 표현하는 제반 예술들이 모두 디지털스토리텔링의 연구 영역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재로 한국에서의 디지털스토리텔링 연구는 온라인게임 특히 웹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게임에 집중돼 있다.2) 온라인 게임에 대한 연구자들의 ‘선택’과 ‘집중’의 배경에는 한국이 세계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인터넷 환경을 갖고 있는 온라인게임 강국이라는 문화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3) 하이퍼텍스트나 웹아트가 아직 국내에는 생소한 영역인데 반해 온라인 게임은 국민게임이라고 일컬어지는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의 학습효과로 인해 익숙한 문화 현상이 돼 버렸다. ‘온라인게임’이라는 새로운 예술에 대한 중심지로서 한국이 갖는 특수성은 게임 서사 이론에 대한 이론적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게 한다.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의 영화를 상연한 이후 영화이론의 진앙지는 유럽이었다. “리치오도 까뉴도라는 1911년 영화를 <제 7 예술>이라고 천명하였고, 루이 델뤽은 <포토제니>라는 개념을 발견했다. 장 엡스텡은 1926년에 <영화는 언어이다>라고 선언했고, 제르맨느 뒬락에 의해 ‘순수영화’와 ‘시각적인 조화’라는 개념이 생겨났다.”4) 앙드레 바쟁과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의 지적 탐색은 영화이론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영화가 처음으로 시작된 유럽에서 영화이론 역시 태동된 것이다.
한국은 온라인게임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95년 12월에 개발이 발표되어 다음해인 96년 4월 상용서비스를 시작한 국내 최초의 MMORPG 게임인 <바람의나라>는 동시에 세계 최초의 MMORPG게임이기도 하다.5)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에서 가장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였고, 보편적 사회현상으로 확장되었으며, 광범위한 유저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온라인게임은 가장 한국적인 디지털 문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스토리텔링 연구의 주 텍스트가 온라인게임에 편중돼 있는 현재의 상황은 ‘현상’과 ‘이론’의 자연스러운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합목적성을 갖는다.
오히려 문제는 디지털스토리텔링의 내용종목이 온라인게임에 편중된 국지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게임을 디지털서사이론으로 정리할 수 있는 연구 역량을 한국의 연구자들이 확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서구의 문학이론이 수입된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생적인 문학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해왔던, 지식 변방인 한국에서, 온라인게임과 연동한 디지털서사이론의 등장은 주변에서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이 논문은 <디지털스토리텔링의 서사시학>이라는 대주제를 염두에 두고 기획되었다. 온라인게임이 디지털서사체로서 갖고 있는 고유한 미적 가치와 구성 원리들이 <디지털 서사학>이라는 학문적 범주로 자리 잡기 위한 몇 가지 전제들을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2. 디지털 서사에서 온라인게임의 위치
정보화 기술의 발전에 의해 가능해진 새로운 형식의 서사물들을 디지털 서사(Digital narration)6)라 명명할 수 있다. 모든 서사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술의 발전에 빚을 지고 있다. <소설>은 인쇄술의 발명으로 인해, <영화>는 영사기술의 발전으로 서사예술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디지털서사>는 컴퓨터와 인터넷, html의 등장으로 인해 가능해졌다. 그리고 그 어떤 서사예술보다도 기술의 발전이 미학적 아우라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디지털 기술로 구현된 가상공간에서의 예술적 변화는 종래의 미학적 차원에서 단순한 도구적 수단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의 개념, 존재형식, 예술가의 행동양식, 예술제도, 예술가와 관중의 관계 등의 폭넓은 범위를 망라한다. 무엇보다 예술개념과 존재형식에 있어 디지털 기술은 종래의 수동적인 응시 대상으로서의 작품을 능동적인 상호작용의 차원에서 정의하고 존재하게 한다. 여기에는 작가 - 컴퓨터 사이의 인터페이스, 작품 - 관객 사이의 인터페이스가 존재하는데, 전자는 창작수단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후자는 소통과 경험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다.7) 디지털 서사가 전통적인 장르 구분을 무시하고 다만 기술의 차이와 참여방식에 근거한 하위 장르를 갖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까지 개발된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인터넷 상에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디지털 서사물은 HTML 기술을 통한 선택적 플롯 구현 방식인 하이퍼 텍스트(Hypertext)와, 플래쉬 기술을 이용하여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된 웹아트(Webart), 3D 기술과 플레이어들의 실시간 공동 참여가 가능한 서버기술의 발전으로 가능해진 온라인 게임(On-Line Game), 문자 음향 영상을 하이퍼 텍스트로 묶어 구현해 놓은 인터랙티브 픽션(Interactive Fiction)이 있다.
현재 디지털 서사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컴퓨터 게임에 집중돼 있다. 이는 온라인게임이 디지털 서사체로서 확고한 지위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여타 장르들이 온라인게임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일종의 반사이익(反射利益)이다.
하이퍼텍스트나 웹아트, 인터랙티브 픽션 같은 디지털 서사 장르들은 국내에서 별다른 관심을 얻고 있지 못하고 있다. 환언하면 활발한 창작 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상 텍스트가 부재한 상황에서 학문적 접근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하이퍼텍스트의 경우 이미 미국에서는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디지털 서사의 대표적인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의 인식 수준은 “미국에서 시작된 새로운 서사 양식” 정도에 머물고 있다. 2000년 이후 다양한 하이퍼텍스트 이론서가 국내에 소개되었지만8)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창작물이 나오지 못하였다. 이론은 있지만 텍스트가 없기 때문에 하이퍼텍스트 연구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9) 이는 웹아트나 인터랙티브 픽션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반해 온라인게임은 이론보다 먼저 텍스트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온라인 게임인 <바람의 나라>가 1996년 4월 첫 상용서비스를 시작하였지만 온라인게임에 대한 인문학 이론서는 그보다 7년 뒤인 2002년에 비로서 출간되었다.10) 특히 IMF를 거치면서 벤처열풍에 편승한 한국 온라인 게임의 발전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만큼 폭발적이었고, 처음에는 단순한 놀이로만 여겨졌던 온라인 게임은 어느 순간 IT 강국 한국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어 버렸다. 온라인 게임이 대중문화의 한 영역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되면서 온라인 게임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문학 영역에서 학문적 관심이 두드러졌는데 이는 온라인게임이 문자형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서사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문학 연구의 한 범주로 위치시킨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온라인게임에 대한 학문적 관심의 또 다른 배경은 연구자들이 직접 온라인게임을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는 유저(USER)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놀이로서 온라인게임을 경험했다가 어느 순간 연구자로서의 관심이 발현되는 과정을 거침으로서 ‘게이머’에서 ‘게임 학자’로 자연스럽게 변신하는 것이다.11) 하이퍼텍스트나 웹아트, 인터랙티브 픽션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서사물이 아니지만 온라인게임은 서점에서 책을 골라 읽듯 그 장르가 다양하며, 초고속 인터넷망의 일반적 보급으로 접근성이 용이하고, 무엇보다도 몰입과 중독의 재미가 있다. 그 어떤 디지털 서사 장르보다는 컴퓨터 게임은 대중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디지털 서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장르로 부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12)
3. 온라인게임 연구의 이론적 성취와 한계
컴퓨터 게임에 관련하여 우리의 학문적 관심과 성취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두었다. 최유찬의 ������온라인게임의 이해������(문화과학사,2002)와 류현주의 ������온라인게임과 내러티브������(김영사,2003)가 의미 있는 개론서 역할을 하였다면, 젊은 연구자들이 공저한 ������디지털스토리텔링������(황금가지,2003)은 게임 연구의 방향을 스토리텔링으로 돌리면서 게임학에 대한 본격적인 각론 토대를 마련하였다. 특히 국내에서는 온라인 게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2005년에 ‘살림’에서 시리즈로 출간된 전경란의 ������디지털게임의 미학������, 한혜원의 ������디지털게임의 스토리텔링������, 이인화의 ������한국형 디지털 스토리텔링������, 이정엽의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 등의 단행본들은 본격적인 온라인 게임 서사 연구의 중요한 성과물들이다.
이 같은 온라인 게임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은 국내 게임시장의 기형적인 구조에서 기인하였다.13)

위 표에서 보듯이 한국 게임 시장은 온라인 게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게임 강국인 미국과 일본에서 PC게임과 비디오게임이 강세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볼 때 한국 온라인 게임의 성장은 분명 주목할 만하다. PC방의 시장 점유율이 점차 하락하고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는 온라인 게임을 쾌적하게 즐길 수 있는 가정용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이 세계 최고 수준인 것과 무관하지 않으며 온라인 게임이 특정 환경에서만 즐길 수 있는 제한적 놀이가 아니라 가정에서도 쉽게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놀이 문화로 자리 잡아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내 게임 연구가 온라인 게임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14)
현재까지 진행된 컴퓨터 게임 연구는 외면적으로 온라인 게임에 집중돼 있는 장르 편향의 문제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학문의 방향성에 대한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온라인게임 연구의 딜레마는 온라인게임을 일련의 서사체 발전 과정에 한 지점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으면 기왕의 발전 과정을 무시한 전혀 다른 새로운 서사체로 보느냐의 선택에서 연구자들이 느끼는 갈등이다. 환언하면 온라인게임을 소설, 영화 등 기존 서사물의 연장 선상에서 이해하려는 ‘서사학(narratology)’과 이전하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산물로 이해하려는 ‘게임학(ludology)’의 충돌이다.15) 전자의 시각을 선택할 경우 온라인게임은 문학 연구의 한 영역이 될 수 있다. 서사학이 여전히 유효한 이론적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기존의 서사학은 용도 폐기되고 전혀 새로운 서사학 이론이 등장해야 한다. 문학 연구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디지털 서사학(digital narratology)이라 명명할만한 학문적 이론이 정립돼지 않은 상태에서 후자를 선택하는 것은 무모하다. 새로운 서사학 이론을 만든다 하더라도 전거(典據)가 되는 것은 기왕의 서사학 이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온라인게임 연구의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이다.
국내 온라인 게임 연구 역시 온라인게임을 소설, 영화 등 기존 서사물의 연장 선상에서 이해하려는 ‘서사학’의 입장과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산물로 이해하려는 ‘게임학’의 입장이 혼융(混融)되어 나타나고 있다. 온라인 게임에 관한 선행 연구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정엽은 이야기 예술의 시점이라는 측면에서 서사학적 입장을 지지한다.
서사문학이 시작된 이래로 대부분의 이야기 예술은 1인칭과 3인칭이라는 틀을 넘지 못했다. 소설이나 영화를 통하여 반복되는 진술은 언제나 ‘나(I)’ 같은 1인칭의 시점이나 ‘그(he)’ 혹은 ‘그녀(her)’와 같은 3인칭의 시점에서만 이루어졌다. - 중략 - 그러나 이야기 예술의 장르가 근대에 들어오면서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면서, 문자로만 이루어진 서술(description)의 진술 형태에서 이미지, 영상, 상호작용성 등의 여러 장치를 통해 재현(representation)의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서술의 형태에서는 시각적으로 충분히 재현되지 않던 꿈이나 환상의 이미지들이 직접적인 형태로 구현되면서 새로운 시점 조작의 가능성을 서사물에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조작의 가능성은 영화에서 컴퓨터 게임을 거쳐 확장되고 있다.16)
그는 아직 게임을 학문으로 정립할 만한 결정적인 게임 이론(game theory)이 정립되지 못한 실정이므로 게임과 여타 장르와의 차이점을 구별해 내는 차원에서 그 도입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서사론을 바탕으로 게임의 시점을 여타의 이야기 예술 장르와 비교 분석하고자 하였다.
전경란은 온라인 게임의 특징을 ‘혼종성’, ‘공간성’, ‘구조적 개방성’, ‘현실의 모사’, ‘사이버정체성의 구현’으로 정리하고 온라인 게임의 서사 양식이 기존의 서사 양식과는 다르다는 게임학의 입장을 취한다.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전통적인 이야기물에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이루는 문장, 쇼트, 장면들은 실질적인 존재이지만, 창작자의 상상세계나 특별한 문학적 영화적 스타일을 형성하는 다른 요소들-계열체들-은 가상적으로만 존재한다. 전통적인 이야기물에서 통합체는 실재이고 계열체는 상상의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가 구성되는 계열체 선택들의 집합은 함축적인 반면, 실제 이야기는 창작자에 의해 구현됨으로써 명시적인 된다.
그러나 MMORPG는 이 관계를 역전시킨다. MMORPG에서 실제 게이머들이 체험하는 이야기, 즉 통합체는 제각기 다른 것이며 이야기에 대한 체험의 방식도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형태의 것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MMORPG에서는 전통적인 이야기와는 다른 배경 이야기, 공간, 아이템 등의 이야기 요소가 게임 내에서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한다. - 중략 - MMORPG에서 이야기 요소들은 게임머의 조합을 기다리는 상태로 제시됨으로써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련의 가능성만으로만 존재한다. 게이머는 배경 이야기, 인물 및 아이템 같은 이야기 요소들을 조합하여 이야기를 생산해날 수 있으며, 이야기는 게이머가 다른 게이머와 어떤 사회적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17)
전경란은 ‘상호작용성’을 온라인 게임의 주요한 작동 원리로 보았다. 영화나 소설과 같은 이야기물들이 선형적인(linear) 사유 체계 속에서 연속성(sequential)의 원리로 이루어진 반면, 컴퓨터 게임과 같은 상호작용 미디어는 대체로 비선형적인(non - linear) 사유과정을 거쳐, 자료들이 자유로운 연상(free association)의 원리에 의해 구축되는 비연속적인(non - sequential) 성격을 갖는다. 게이머 간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MMORPG에서의 강점은 게이머에게 하나의 완성된 사건구조를 강제하기보다는 게이머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건을 유발하고 그 진행을 자유롭게 경험하는데 있다. 따라서 MMORPG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변형되며, 도달해야 할 최종적인 상태가 없는 형식(endless rhizome)의 이야기물이며,18) 이는 기존의 서사물과 분명히 다른 온라인 게임만의 서사성이라는 것이다.
이인화는 온라인 게임의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그것이 구현되는 방식은 온라인 게임의 제작 과정이 갖는 디지털적 미디어의 속성 때문에 소설이나 영화와 변별된다는 중도적인 입장에서 한국형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에 대해 역설한다.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에서는 시간이 공간에 선행한다. 이에 비해 「리니지2」와 같은 온라인 게임 스토리텔링은 공간이 시간에 선행한다. 스토리의 구성 요소를 크게 사건과 존재물(캐릭터, 아이템, 장소)로 나눌 때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은 시간적 연쇄를 갖는 사건의 구성을,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허구적 공간을 구성할 수 있는 존재물의 구성을 우선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이 이야기 요소들을 종(慫)적으로 결합시켜 시간을 축으로 이어놓는 것이라면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선택 가능한 이야기 요소들을 횡(橫)으로 병렬시켜 공간의 축으로 이어놓는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시간의 축이 실재하며 공간의 축은 작가의 상상세계에는 있지만 사용자 앞에 구현된 텍스트에서는 가상적으로 존재한다. 반대로 「리니지2」와 같은 디지털 스토리텔링에서는 선택 가능한 존재물들이 만드는 공간의 축이 실재하며 시간의 축은 사용자에 따라 제각기 달라질 가능성을 안고 가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19)
그러나 허구적 공간을 구축한 모든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사용자들의 흥미를 끌고 사용자의 관심과 내비게이션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 허구적 공간이 스토리가 자라날 수밖에 없는 서사 잠재력(the potential power of narrative development)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학자이기 이전에 소설가이기도 한 이인화에게는 바로 이 서사 잠재력이 온라인 게임이 소설이나 영화와 같이 본질적으로 이야기 예술이라는 근거가 된다.
이인화가 한국 온라인 게임 스토리의 구현 원리로 정리한 ‘자발적 갈등 형성의 원리’, ‘친교 모형 확장의 원리’, ‘공간적 역동성의 원리’, ‘윤리적 가치 창조의 원리’는 모두 온라인 게임의 서사 잠재력의 표상(表象)이며, 소설이나 영화의 스토리 구성 원리와 변별되는 디지털 서사의 새로운 지점이다.
마지막으로 살펴 볼 한혜원은 ‘서사학’과 ‘게임학’ 양자를 모두 비판한다. 그는 먼저 서사학적 입장에서 지지되고 있는 <서사 진화론>의 오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20)
첫째, 전통서사학자들의 이론은 ‘하이퍼픽션(hyper fiction)'이나 ’넷필름(Net Film)' 등이 고전(苦戰)을 면치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서사학자들의 공식에 따르자면 기존 서사물의 법칙을 그대로 답습하는 가운데 상호작용성이 덧붙여지면서 나타난 이러한 장르들은 기존의 소설이나 영화보다 성행해야 옮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둘째, 전통서사학자들은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 이미 그 스토리를 검증받은 작품들이 게임화되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 성공하지 못하는 예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처럼 게임의 서사를 기존 서사물인 소설이냐 영화의 연장선상에서 정의하고 평가할 경우, 게임은 게임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각각 다른 길로 나아가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서사학 중심의 게임 분석에 반기를 들고 “게임은 게임이다”라는 모토 아래 게임을 독자적인 학문의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는 <게임학>에서는 기존의 서사학의 잣대로 게임을 분석할 경우 ‘재현(representation)’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정작 게임에서 중요한 ‘시뮬레이션(simulation)’의 성격을 간과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게임학의 측면에서 정리한 게임의 특성에 따르면 게임은 서사리기 보다는 시뮬레이션에 가깝다. 시뮬레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플롯(plot)’이 아니라 놀이의 ‘규칙(rule)’이며, ‘인물(character)’을 재현하는 것(representing)이 아니라 규칙에 따른 행동의 법칙을 통합하여 모델화하는 것(modeling)이라는 것이 게임학자들의 설명이다. 서사가 재현 양식이기 때문에 독자나 관객으로부터 감정의 자극을 유발한다면, 게임은 시뮬레이션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로부터 행동을 유발한다. 소설이나 영화가 사건들의 시퀸스로 이어진다면, 게임은 행동의 법칙들로 엮어진다. 때문에 게임학자들은 ‘서사물의 작가(narrauthor)’와 ‘시뮬레이션의 작가(simauthor)’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게임에서 서사를 아예 배제해 버리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치부하는 게임학의 논리에도 허점이 있다고 한혜원은 보았다. 초창기 온라인게임에서는 서사가 별로 중요한 구성 요소가 아니었지만 기술적인 한계가 극복되고 게임이 발전해감에 따라 서사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초기 게임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스토리가 RPG는 물론 스토리가 중시되지 않는 액션 게임에서까지 점점 강화되는 추세를 게임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서사학과 게임학 양측 모두 분명 무게중심은 다르지만, 게임을 새로운 서사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분석의 틀로 분석되어야 한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논쟁만 이어지고 있을 뿐, 정작 유의미한 새로운 분석의 틀을 제시하지 못하는 점이 현 단계의 한계로 지적된다.21)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혜원은 서사학과 게임학 모두를 포함하는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 “게임은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서사라는 끝없는 우주에서 새롭게 발견된 은하다”라는 그의 진술이 이를 뒷받침한다.
서사학과 게임학의 충돌을 피하고 온라인게임 연구에서 방향성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사학과 게임학 모두를 포용하는 중도적 입장이 가장 유용하다. 그러나 이 입장은 자칫 서사학과 게임학으로 분리되었을 때 이룰 수 있는 학문적 성취를 삭감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두 영역이 서로 경쟁하며 논의를 진행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변증법적인 통합이 이루어져야지 인위적으로 봉합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아직 컴퓨터 게임에 대한 이론적 토대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못한 현 상황에서는 오히려 서사학과 게임학의 충돌이 학문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일 수도 있다.
필자는 서사학의 입장에서 온라인게임 서사 이론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서사학과 게임학이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을 통해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게 됐을 때 비로소 <디지털 서사학>은 완성될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4. 나오는 말
필자는 이미 <디지털 서사체의 미학적 구조>라는 주제 하에 ‘웹아트’와 ‘인터넷소설’을 분석한 바 있다.22) 웹아트 분석에서는 문자 중심 서사가 음영 중심 서사로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서사 양식에 대해 논의하였고, 인터넷소설 분석에서는 전통적인 서사물에서의 작가-독자 관계가 ‘게시판’이라는 전자 종이 위에서 붕괴되는 과정의 시학적 의미를 밝혀보았다. 그러나 웹아트나 인터넷소설 모두 “현실 또는 허구의 사건과 상황을 하나의 시간 연속을 통해 표현한 것”이라고 서사물의 근본적인 규칙을 위반하지는 않았다. 두 서사 형식 모두 일정한 규칙(선형적으로 존재한다는)의 시간의 결합축 위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는 전통적 의미의 서사물과 교집합을 갖는다.
이에 비해 온라인 게임은 주관화된 시간축 위에서 객관화된 공간축을 배경으로 스토리와 플롯의 멀티플(multiful)한 결합이 비선형적으로 이루어지는 다중 화자와 유동적인 시점의 서사 양식이다. 시간과 공간, 스토리와 플롯, 화자와 시점은 이미 익숙한 전통적 서사 양식의 요소이지만, 온라인 게임은 그 요소들을 이어 쓰면서 동시에 새롭게 고쳐 쓴다. ‘이어쓰기’에 주목한 것이 서사학이라면, ‘고쳐쓰기’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것은 게임학이다. 그러나 이어 쓰던 고쳐 쓰던 온라인게임이 ‘시간과 공간’, ‘스토리와 플롯’, ‘화자와 시점’이라는 구성 요소들을 “쓰고” 있기 때문에, 온라인게임은 서사다.23)
이 세 가지 구성 요소들이 문학과 영화, 온라인게임에서 각각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각 서사체 간의 동종성(同種性)과 이질성(異質性)이 파악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디지털서사학>이라 영역화할 수 있는 새로운 서사이론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이 논문은 앞으로 진행될 연구의 출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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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란, ������디지털게임의 미학������, 살림, 2005.
한혜원, ������디지털게임 스토리텔링������, 살림, 2005.
______. 「디지털게임의 환상성 연구」, 제3회 디지털스토리텔링 컨퍼런스 발표집, 2007.
1) 이인화 외 공저, ������디지털스토리텔링������, 황금가지, 2003, pp.7-14. (부분 인용)
2) 디지털스토리텔링을 온라인게임과 연관지어 논의한 단행본과 논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영봉, 「게임과 스토리텔링」,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전국학술대회 발표집, 2007.
김원보, 최유찬 공편, ������온라인게임과 문화������, 이룸, 2005.
류현주, ������온라인게임과 내리터브������, 현암사, 2003.
이용욱, 「온라인 게임의 놀이적 맥락과 환상성」, 대중서사연구 제16호, 2006.
______, 「디지털서사체의 미학적 구조」, 한국언어문학 제56집, 2005.
______, 「디지털시대, 문학연구방법론의 새로운 모색」, 국어국문학 제143호, 2006.
______, 「온라인게임의 서사적 지위에 관한 연구」, 디지털스토리텔링 연구 제1호, 2006.
______. 「온라인게임 스토리텔링의 서사구조 연구」, 게임산업저널 제6호, 2004.
이인화 외 공저, ������디지털스토리텔링������, 황금가지, 2003.
이인화, ������한국형 디지털 스토리텔링������, 살림, 2005.
이정엽, 「디지털 게임의 서사학 시론」,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전국학술대회 발표집, 2007.
______, 「디지털게임의 환상성과 정치적 무의식」, 대중서사연구 제14호, 2005.
______, ������디지털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 살림, 2005.
전경란, ������디지털게임의 미학������, 살림, 2005.
한혜원, ������디지털게임 스토리텔링������, 살림, 2005.
______. 「디지털게임의 환상성 연구」, 제3회 디지털스토리텔링 컨퍼런스 발표집, 2007.
3) 2007년 대한민국게임백서에 따르면, 2006년 국내 게임 시장은 7조4천5백억 원(‘05년 8조6천8백억 원, ’05년 대비 14.2% 감소), 수출 규모는 6.7억 달러(‘05년 5.6억 달러, ’05년 대비 19.0% 증가)를 달성하여 시장 규모는 감소한 반면, 수출 성장세는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온라인 게임의 경우 2005년에 비해 약 23% 이상 성장한 1조7,768억 원에 달했고, 게임 수출에 있어서도 전년 대비 수출액이 약 30% 증가한 5억9,999만 달러로, 게임산업 전체 수출의 89%를 차지하며 수출을 주도하였다.(http://www.gitiss.
org
부분 인용)4) 류상욱, 「영화는 세상의 총체성에 관한 회복이다」, ������키노������ 1998년 6월호. (부분 인용)
5)외국의 게임 관련 리뷰나 논문에는 <오리진>이라는 회사의 ‘울티마온라인’을 세계 최초의 MMORPG 게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울티마온라인’은 96년 5월 베타서비스에 들어가 다음해 9월 30일에 상용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개발 시기나 상용서비스 개시일에서 ‘울티마온라인’은 ‘바람의나라’에 뒤져있다. 지명도의 약세 때문에 빚어진 이 같은 오류를 바로잡는 것도 연구자들이 해야 할 역할이다.
6) 디지털 서사는 컴퓨터 기술을 기반으로 인터넷 상에 구현된 다양한 형태의 멀티미디어 텍스트를 일컫는다. 온라인게임은 디지털 서사의 하위 장르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온라인게임의 서사 시학을 연구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디지털 서사학>이라 명명할 수 있는 새로운 서사 이론의 단초를 마련하기 위한 기본틀을 제공하는데 있다.
7) http://www.kpaf.org/kpaf_art/200010/200010-01-1.htm
8) 국내에 출판된 하이퍼텍스트 관련 이론서는 다음과 같다. 번역서로는 ������하이퍼텍스트 2.0������(조지 P.랜도우 저, 여국현 외 옮김, 문화과학사, 2001)이 있고, 국내 학자들의 논저로는 류현주의 ������하이퍼텍스트문학������(김영사, 2000), 배식한의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책세상, 2000), 최혜실의 ������모든 견고한 것들은 하이퍼텍스트 속으로 사라진다������(생각의나무, 2000), 유현주의 ������하이퍼텍스트������(연세대학교출판부, 2003), 정형철의 ������하이퍼텍스트 이론������(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3), 김종회가 엮은 ������사이버문화, 하이퍼텍스트문학������(국학자료원, 2005), 장노현의 ������하이퍼텍스트서사������(예림기획, 2005) 등이 있다.
9) 특히 2000년에 야심차게 시도된 하이퍼텍스트 프로젝트인 <언어의 새벽>과 2001년 <디지털 구보 2001>의 실패는 독자의 맘을 움직이지 못하는 성급한 이론의 폐해가 얼마나 참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소수 문학 권력에 의해 이벤트로 기획된 프로젝트가 오히려 한국 하이퍼텍스트의 발전을 퇴보시킨 것이다.
10) 온라인게임에 대한 최초의 인문학 이론서는 그 기준이 다소 애매하지만 최유찬이 2002년에 문화과학사에서 출간한 ������컴퓨게임의 이해������가 될 것이다.
11) 최유찬은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인 <삼국지>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온라인게임의 이해������를 쓰는 배경이 되었고, 이인화는 그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 작업을 한 <길드워>의 열혈 유저이다. 나 역시 1990년대 초부터 텍스트머드를 시작으로 PC게임과 온라인 게임을 10년 이상 해오고 있는 컴퓨터 게임 마니아다.
12) ‘대중성’이 예술 텍스트로서 부적합한 미학적 가치라고 생각한다면 산업혁명 이후의 소설의 등장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소설이 자본주의 서사예술의 총아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은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신흥지배계급으로 떠오른 부르주아의 대중적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13) [2005게임백서]국내 게임시장 분야별 비중 전망(2003년~2007년) 참조
14) 온라인 게임 서사 연구자들은 온라인 게임의 유저이기도 하다. 이는 문학 연구가 연구자들을 먼저 독자로 만드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15) 두 학문 영역 간의 충돌에 대한 외국 학계의 논의는 한혜원의 ������디지털 게임 스토리텔링������(살림,2005)의 제1장 ‘게임과 서사의 충돌과 화합’을 참조하기 바람
16) 이정엽, ������디지털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 살림, 2005, pp.8-9.
17) 전경란, ������디지털게임의 미학������, 살림, 2005, pp.38-39.
18) 전경란, 앞의 책, pp.69-77.(부분 요약)
19) 이인화, ������한국형 디지털 스토리텔링������, 살림, 2005, pp.37-38.
20) 한혜원, ������디지털 게임 스토리텔링������, 살림, 2005, pp.11-24.(부분 정리)
21) 한혜원, 앞의 책, p.23.
22)‘디지털 서사체의 미학적 구조 연구(1) - 웹아트의 디지털 내러티브를 중심으로’,『한국문학이론과비평』17집,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2002.; ‘디지털 서사체의 미학적 구조 연구(2) - 전자종이로서의 인터넷 게시판의 문학적 가능성’,『어문연구』43집, 어문연구학회, 2003.
23) 여기서 ‘쓰다’는 ‘writing'과 ’use'의 의미 둘 다를 포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