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국문학과는 소멸되는가

국문학과 위상 하락 폐과(廢科) 줄이어
졸업생 직업 선택 폭 좁은 게 가장 큰 이유
문화콘텐츠·디지털 스토리텔링 등 새 분야 개척
전문성 없는 ‘아류 국문학’의 등장은 경계해야

“없애면 안 된다”
“디지털시대여도 기본은 인문학
당장 필요없다고 본질을 없애면 위험
가뜩이나 빈곤한 창의력 더 악화될 것”

“변해야 한다”
“순결주의만 고집하단 고유 영역마저 축소
수박 겉 핥기식 공부론 경쟁력 없어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 일러스트 이경국
한양대 안산캠퍼스에는 ‘문화콘텐츠학과’라는 학과가 있다. 2004년 국제문화대학 인문학부 안에 개설된 이 학과는 아직 첫 졸업생도 배출하기 전이지만 벌써부터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문화콘텐츠(30명)와 국어국문학, 문화인류학 등 3개의 전공이 포함된 인문학부 정원은 120명. ‘모집정원의 최대 120%까지 학생을 뽑을 수 있다’는 교칙에 따라 문화콘텐츠학과는 설립 첫해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36명씩을 뽑아왔다. 희망자가 폭주했기 때문이다. 외관상 공통과정을 이수한 후 자신이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게 돼 있지만 해마다 이 학과는 학부 전체 1등에서 36등까지를 싹쓸이했다. 한양대는 내년 문화콘텐츠학과를 학부에서 독립시킬 계획이다. 모집 정원도 40명으로 늘어난다.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문화콘텐츠 전공이 인문학부에서 빠지면 좋은 학생을 더 이상 끌어올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문화콘텐츠는 영화·게임·애니메이션·음반·캐릭터·방송·전자책(e-book)과 같은 영상미디어와 뉴미디어를 기반으로 저장, 유통, 향유되는 문화예술의 내용물을 일컫는 말이다. 여러 분야가 한데 얽힌 대표적인 ‘컨버전스(convergence)’ 학문이다. 그런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설립을 주도한 박상천(52) 교수와 박기수(42) 교수는 국문학자다. 박상천 교수는 시인 출신이고 박기수 교수 역시 석사학위 논문 주제로 ‘김기림 시인론’을 택했던 문학비평 전공자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문화콘텐츠학과는 국문학과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총 4명으로 구성된 교수진 중 두 박 교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각각 신문방송학과와 경영학과 출신이다. 개설 과목 대부분이 ‘만화대본 워크샵’ ‘게임 기획과 시나리오’ ‘문화이벤트 컨설팅’ 등 철저하게 실습 위주로 꾸려진다는 점도 독특하다. 재학생 전원은 3학년 1학기부터 3학기 동안 관련 업체에 파견, 인턴으로 근무할 기회도 얻는다. 업체 알선과 파견 비용 부담은 모두 학교 몫이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6번 코너에는 컴퓨터·전기·전자 관련 서적이 모여 있다. 한혜원(31) 계원조형예술대 교양학부 교수가 공동저자로 참여한 책 ‘디지털 스토리텔링’(황금가지)을 찾으려면 이곳으로 가야 한다. 디지털 스토리텔링(digital storytelling)이란 디지털 기술을 매체 환경이나 표현 수단으로 수용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디지털 콘텐츠를 지칭하는 용어다. ‘윈도우 웹 서버 보안’ ‘현대암호학’ 등과 나란히 꽂혀 있는 이 책 역시 한 교수와 이인화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를 비롯한 국문학자들이 엮은 것이다.

한혜원 교수는 이화여대 국문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그 역시 현대문학을 전공하다 몇 년 전부터 게임 스토리텔링을 깊이 있게 연구해오고 있다. 그는 카이스트(KAIST) 대우교수를 거쳐 올 초 계원조형예술대 전임 강사로 정식 임용됐다. 아직 박사논문이 진행 중이고 젊은 나이임을 감안할 때 파격적인 조건이다.


학과 명칭 바꾸는 학교도 늘어 

흔히 ‘국문과’로 통칭되는 대학 국어국문학과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나 한혜원 교수의 경우와 같이 국문학 본류에서 이탈한 후 전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사례가 그 첫 번째 현상. 가톨릭대에서는 국어국문학과 재학생이 디지털문화학부 수업을 연계전공 형태로 수강할 수 있다. 서울대 국문학 박사 출신인 송성욱 교수가 시스템을 만들었다. 인하대(인천)의 경우 한 캠퍼스에 국어국문학과와 문화콘텐츠학과가 공존하고 있다. 서원대(충북 청주) 김외곤 교수는 국문학자이지만 국어국문학과 소속이 아니라 광고홍보영상학부 내 문화콘텐츠 전공 지도교수다. 강원대에서도 작년부터 국어국문학과와 별개로 문화예술대학 소속 스토리텔링학과가 개설, 운영되고 있다.

학부는 그대로 두되, 대학원 과정에서 비슷한 실험을 감행하는 대학도 늘고 있다. 디지털미디어학부를 만들어 국문학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이화여대 이인화 교수가 대표적인 예. 성격은 약간 다르지만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을 본떠 만든 카이스트(KAIST)의 CT(Cultural Technology)대학원도 비슷한 경우다. 매년 10억원씩 총 100억원의 국고 지원이 확정된 CT대학원의 경우, 최근 ‘불멸의 이순신’의 소설가 김탁환 교수와 ‘경성기담’의 저자 전봉관 교수 등 서울대 국문학 박사 출신 교수진을 대거 영입해 화제를 불러모았다.


▲ 국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의 위기’와 맞물려 있다. 사진은 작년 9월 전국 80개 인문대학이 모인 가운데 이화여대에서 열린 인문주간 개막식. ‘인문학 교육 정상화를 위한 성명서가 발표됐다. (photo 조선일보 DB)
기존 학과의 성격을 유지하되 타이틀, 즉 학과 명칭을 바꾸는 학교도 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호서대학교(충남 아산). 이 학교에서 국어국문학 전공은 한국어문화학부에 포함돼 있다. 독특한 것은 한국어문화학부로 입학한 학생 전원은 국어국문학 이외에 또 하나의 전공인 문화콘텐츠창작을 복수전공해야 한다는 점이다. 학교 측은 “졸업과 동시에 두 개의 졸업장을 획득할 수 있으며 국어국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문화콘텐츠 분야의 인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학생 모집에 나서고 있다. 장안대(경기 화성)의 경우 아예 국어국문학과 자체가 없다. 대신 ‘디지털문예창작과’가 있다. 소속 교수 3명은 모두 국문학 박사 출신. 이 학교 역시 학습목표에 스토리텔링이나 멀티미디어 저작 도구, 디지털 콘텐츠 등의 용어가 빠지지 않는다.

최근 신설되는 대학이나 전문대학의 경우 아예 출발 단계에서부터 국문학과를 만들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1994년 설립된 동양대(경북 영주)에는 국어국문학과가 없다. ‘교양학부’라는 게 있어 국문학을 전공한 교수진이 약간 명 배치될 뿐이다. 1993년 설립된 남서울대(충남 천안) 역시 인문계열에 국어국문학과가 포함돼 있지 않다. 대신 교양과정부에 ‘국어 한문 전공’ 교수가 3명 있다. 성결대(경기 안양)의 경우 국문학과와 사학과를 합쳐서 ‘한국학부’라는 이름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

학과의 존재와는 별도로 대학 1년생의 대표적 필수 교양과목이었던 ‘국어와 작문’ 역시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국어와 작문’을 ‘필수’가 아닌 ‘옵션’으로 돌린 최초의 대학은 가톨릭대. 교수가 되기 전 국문학 강사들의 최고 일자리였던 ‘국어와 작문’이 사라지면서 해당 강사들은 졸지에 갈 곳이 없어졌다. 몇 년째 2~3개 대학에서 ‘국어와 작문’을 강의하던 한 강사는 지난 학기 “국어와 작문 대신 디지털 스토리텔링 강의를 해주면 안 되겠느냐”는 요구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현재 국어국문학과의 전통이 오랜 서울 소재 일부 대학을 제외하고 전체 신입생에게 비교적 엄격하게 ‘국어와 작문’ 수강을 요구하는 학교는 한성대와 한국방송통신대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 국문과 강사들의 얘기다.